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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때로 스스로 외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그 창조된 고독을 즐긴다.
은적산방 2004/12/10 11:19    

1993년 달마산 미황사.
주지 스님은 내가 한 달 정도 미황사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이 기간 동안 참으로 소중한 것들을 체험했다.
이후로 나의 생활방식과 세계관은 많이 달라졌다.

내가 머무를 방은 명부전 바로 옆에 있는 온돌방이었다. 산 속이라 여름에도 불을 지펴야 한다고 해서
해질 무렵에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땠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멀리 어란포가 있는 서해 바다 위로 번지는 저녁노을과 어우러져 잠시 노닐다가 이윽고 달마산 울창한 숲을 휘감아 돌며 능선 너머로 사라졌다.
어둠과 더불어 온 세상은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고 시간은 느리게 갔다.


< 해남 달마산 미황사 전경>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산중 생활이었다. 바쁘게 뛰어 다니지 않으면 못살 것처럼 사람들을 옥죄는 대도시의 번잡한 환경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물소리, 바람소리뿐이었다.
생각과 행동을 느리게 하지 않으면 적응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이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독서와 산책이었다.
달마산 정상까지 가는데는 1시간 남짓 걸렸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말 그대로 선경이었다. 남서 방향으로는 완도와 진도로 이어지는 남해 바다가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고, 북으로는 크고 작은 산들과 구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그 사이사이에 푸른 들을 품고 있는 모습이 정겹게 들어온다.
그러나 너무 위치가 높고 사방이 트인 곳에서는 생각이 모아지기 어렵다. 그리고 자칫 교만해지기 쉽다.
높은 자리란 그런 속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보다는 오히려 산아래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산책길로 택했다. 왕복 1시간 정도 걸리는 길인데 마을 못미처 산기슭에 아담한 호수가 있다. 이 저수지 둑에서 미황사 쪽을 바라보면 달마산 전체가 수면 위에 잠긴다. 한참동안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천천히 요사채로 돌아오곤 했다. 소나무, 참나무, 동백나무가 무성한 이 오솔길을 이른 아침에 그냥 천천히 걷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때가 제일 좋았다. 숲속에서는 물소리 바람소리 외에 가끔 새소리가 들려왔다.

또 하나의 산책길이 있었는데 그것은 대웅전에서 부도전까지 가는 길이었다. 그 당시에 이 길은 거의 잡목과 풀로 가려져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숲길을 걷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부도전까지 가는 길도 좋았지만 부도전에 세워져있는 여러 비석들의 모양과 형태와 질감을 구경하는 것도 참 좋았다. 한문이 짧아 비문을 읽고 해독하지는 못했지만 비석에 새겨져있는 그림과 글씨의 여러 형태를 감상하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다른 대형 사찰들과는 달리 이 미황사의 부도전은 너무나 쓸쓸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쓸쓸한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

사람이란 참 이상한 면이 있다.
사람들은 가끔씩 스스로 외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창조된 고독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그 외로움을 즐긴다.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이 고독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해해주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바란다.
그러나 누가 타인의 외로움을 진정으로 이해해줄 수 있을까?
그 외로움을 이해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은 아쉽지만 사람이 아니다.
한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솔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어디선가 발원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소리이다. 현대의 도시인들이 활기차고 분주하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 외로움으로 마음이 지쳐있는 까닭도 바로 이 한적한 숲속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바람소리를 듣지 못하고 오염된 문명의 소음에게 빼았겨버렸기때문이다.
그런 자연환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도전 가는 산책길은 나에게 맑은 자연의 소리를 다시 경청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다시 어린 시절의 때묻지 않은 감각을 되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한 밤 중에는 대웅전 앞뜰에 나와서 큰 너럭바위 위에 앉아있곤 했었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이 있고 대지에는 어둠이 있었다. 인적 하나 없는 이 깊은 산 속 뜨락에 나 혼자 마당에 나와 있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이 밤중에도 숲 속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처마 밑 풍경을 울리고 계곡에서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랫동안 새벽이 오는 줄도 모르고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대도시에서 정신없이 사느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저 심연을 일깨우는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가끔 스님은 커다란 단풍나무 그늘 아래 놓인 평상마루 위에다 찻자리를 펴고 향기로운 차를 우려내어 대접하셨다. 우리는 평상 옆에 탐스럽게 피어있는 수국을 감상하면서 그 그윽한 차를 마셨다. 지금까지 서른이 다 되도록 이런 맛을 모르고 살았다니...! 서양식 교육만 받아온 나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집집마다 커피 세트는 갖추어 놓았지만 우리 차와 차도구를 갖추어놓고 차를 마시는 가정은 드물었다.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때보다는 더 나아졌지만.

스님께 우리 차와 전통문화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해서도 기초적인 법문을 자주 접해 들었다. 오후 예불 때는 스님 곁에서 108배를 하며 예를 올렸다. 아름다운 미황사 대웅전 법당에 울려 퍼지는 독경소리와 목탁소리는 또 얼마나 청아하고 부드러웠던가?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미황사에서의 한 달은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다시 산에서 나와 일상으로 돌아갔다.



대도시의 일상 속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 자연의 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산과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심산유곡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맑은 물소리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매일 숲길과 들길을 걷는 꿈을 꿨다. 도시 문명이 발산하는 소음 속에 살아가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마침내 결단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

결국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이사할 수 밖에 없었다.
은적산 너머의 저녁노을과 월출산 미왕재의 달오름을 볼 수 있는 곳, 마을마다 풍광 좋은 정자가 있고 솔바람 소리 들리는 소나무 동산이 있는 곳, 그리고 마을과 마을을 휘감아 흐르다 마침내 넓은 들녘을 가로질러 바다를 꿈꾸며 여여히 흐르는 영산강이 있는 곳, 나의 아름다운 고향 영암으로.



독자 의견 목록
1 . 자연으로 돌아가라... 무심 2004-12-12 / 13:06
2 . 부럽소 노만 2004-12-13 / 11:12
3 . 한 달을 그리 살았던 님이 부럽습니다 버버다리 2004-12-14 / 00:09
4 . 은적산방님.. 율전 2004-12-14 / 03:11
5 . 은적산방님 죄송합니다 코스모스 2004-12-14 / 08:02
6 . 미황사에 가본적이 있나요. harry 2004-12-14 /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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