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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기행
- 과거와 현재가 어우리는 문화의 거리에서 -
최기종 2008/01/17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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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종 시인 ©우리힘닷컴


본 글은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자 영암중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재직 중인 최기종 시인의 인사동 기행문입니다.

원고를 보내 주신 최기종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회 모임을 인사동에서 열기로 했다. 특색있게 테마 형식으로 꾸며보자는 의견을 따른 것이다. 우리 회가 서울에서 모인 적은 한 번도 없다. 우선 교통이 불편하고 숙박이나 먹거리가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모임 장소가 대부분 모이기 용이한 지방이나 자연 경관이 괜찮은 곳으로 정해 졌다. 그런데 지난여름 모임에서 글씨 쓰는 이 선비가 문화적 빈곤을 해결하자며 인사동을 모임 장소로 추천한 것이다.
     목포에서 용산행 KTX를 탔다. 용산역에서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종각역에서 내려서 탑골 공원에 도착하면 그 옆으로 인사동 문화의 거리가 펼쳐진다고 한다. 고속버스를 이용할 경우에는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안국역에 내려서 6번 출구로 나와서 1분정도 걸으면 된다. 우리는 용산역으로 마중을 나온 지인의 자가용으로 인사동에 다다랐다.

     인사동 길은 안국동 4거리에서 종로 2가까지 이어지는 일방통행로다. 한 500여m 정도 되는데 돌로 된 보도 브럭이 깔려 있었다. 토, 일요일에는 차없는 거리로 운영된다고 한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석장승이었다. 원래 그 자리에서 세월을 견디어 왔는지 아니면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면서 세워졌는지 모르지만 2개의 석장승이 가슴팍에 주장군, 정원당장군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과장된 이목구비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굳게 서 있는 모습이 인사동 지키미로서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골목으로 접어들었더니 양쪽으로 지필묵 가게들이 줄비하게 늘어서 있다. 조선시대 도화원이 있었던 자리라 그런지 묵향이며 종이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것 같았다. 고서적이나 골동품 가게, 표구사, 공방이나 죽집, 찻집, 카드나 선물을 파는 문방구들이 올망졸망 이어지고 있었다. 중간중간 현대식 건물들도 눈에 띠었는데 커피숍나 겔러리, 박물관 간판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길 양쪽으로 인사 3길, 4길과 같은 골목길이 나뭇가지처럼 뻣어 있었다. 그 길에는 밥집이며 술집, 찻집 등 각종 먹거리 상가가 즐비했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꾸역꾸역 밀려오고 빠져 나갔다. 서양인, 일본인, 중국인 동남아 관광객들도 많았다. 호떡을 사려고 줄을 선 모습이 장관이었고 여기저기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들이 행인들을 붙들고 있었다. 움직이는 장난감이 어린이들의 시선을 끌었고 뽑기 사탕을 파는 아줌마, 엿장수의 가위소리, 대금을 부는 악사,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 사주나 궁합을 보는 역술인까지 모두 인사동 거리의 명물이었다.
     1차 귀착지인 찻집 <귀천>을 찾았다. 천상병 시인의 미망인이 경영하고 있는 찻집이다. 우리 회가 모이기로 한 곳이다. <귀천>은 인사동 3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있었다. 옛날처럼 간판이 수수했다. 낮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년 여자가 맞이한다. 설마 천 시인의 부인은 아니겠지. 찻집 내부도 좁기는 마찬가지였다. 좁은 공간에 5개의 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다. 검게 칠해서 투박하게만 보였다. 벽지며 걸린 그림이나 사진이며 하다못해 계산대나 주방까지도 투박하게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예전에 많이 드나들었던 것처럼 익숙한 공간이었다. 마치 원초적 고향처럼 낯설지 않았다. 거기에 앉아서 차를 마시니 유수 같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마음이 안정되었다. 아내는 모과차를 시켜놓고 대 만족이었다. 양이 많다며 향기가 은은하다며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한다.
     제일 먼저 송 선비 내외가 들어왔다. 이번에도 1등을 놓치지 않는다. 다음으로 조 선비가 외톨이로 들어온다. 마누라는 어디 뗑겼냐니까 허리를 다쳐서 거동이 불편하다고 한다. 여수 김 선비에게서 전화가 왔다.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물론 며칠 전에 불참 의사를 통보했었다. 마지막으로 이 선비 내외가 어렵게 <귀천>을 찾아 왔다. 자가용을 끌고 와서 종로 거리만 빙빙 돌았다고 하소연 한다. 거기서 모과차, 쌍화차, 녹차, 매실차, 오미자, 단팥죽을 들면서 여독을 풀었다.
     저녁 식사는 <전주집> 백반 정식으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특식으로 1인당 25,000원이다. 그래도 가자고 하니까 부인들이 극구 반대다. 그 뜻을 따라서 부담이 적을 것 같은 <해인 식당>으로 갔다. 여기도 인사동 3길 <귀천> 옆에 있었다.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갈한 한식집 내부로 통한다. 친절한 주인의 안내를 받으면서 자리를 잡았다. 생각보다 가격도 안성맞춤이다. 우선 황태구이와 녹두로 빚은 빈대떡을 시키고 저녁 식사로 대구머리찜을 주문했다. 이런 자리에서 술도 필요하다며 쌀로 빚은 특주도 시켰다. 기본 반찬이 차려지고 황태구이와 빈대떡, 특주가 나왔다. 황태구이는 담백하고 간이 잘 맞아서 이구동성 감탄한다. 빈대떡도 손들이 많이 간다. 잔마다 술을 채우고 축배를 나눴다. 맑은 청주의 향취가 그윽하다. 저녁 식사로 나온 대구머리찜도 끈적끈적하게 입맛에 맞았다. 농익은 살고기와 우유빛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모두들 최고의 식사를 했다며 괜찮아 했다.

     한흥장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인사동 거리를 거닐면서 풍취를 느끼기로 했다. 휘황찬란하면서 수묵화의 은근한 빛을 잃지 않는 밤거리였다. 쏟아지는 인파와 연인들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이집저집 건너 다녔다. 4층 건물인 쌈지길도 올라가고 골동품 가게도 들어가고 필방, 지업사나 토토집도 드나들었다. 만물상, 노점 초상화가의 집도 기웃거렸다. 그리고 인사동에 근접해 있는 청계천도 갔다. 종로 2가 네 거리를 횡단해서 5분 정도 내려가면 청계천이 나왔다. 청계천 물길을 따라서 즐거운 산책을 했다. 말로만 들어서는 시멘트로 범벅이 된 청계천으로 알았는데 그래도 서울의 명물은 청계천이었다. 강폭이 중소도시 하천 정도에 불과하지만 맑은 물소리를 내면서 끊임없이 흐르는 청계천이 도심의 휴식 공간으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설해서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 탈이 없는 것을 보면 성공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계천은 당연히 이명박 당선자의 업적이었다. 물론 자연 정화능력이 없고 생태계의 복원이 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그러나 썩은 물만 흐르던 곳을 그 옛날 청계천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이렇게 인파까지 북적거리는 것을 보면 이 당선자를 칭송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정도가 아닐까?
     청계천을 구경하고 다시 인사동으로 돌아와 두대문집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두대문집은 대문이 앞뒤로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거기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천방지축 날뛰고 있는 인수위의 방자한 행태를 비난하기도 하고 대학 입시 문제, 공교육 문제, 경부운하 문제에 대하여 담소를 나누었다. 그런데 서로 간에 생각이 많이도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도 가치관이 다른 것은 살아가는 환경이나 경제적 취향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자정이 넘어서 술자리를 파했다. 종업원들이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재촉해서 떠밀리듯이 일어난 것이다. 이 선비가 술 한 잔 더하자고 했다. 시초에는 사양하면서 술을 조심하더니 이제야 술기운이 발동한 모양이다. 송 선비도 덩달아 그러자고 했지만 그래도 몸 관리를 해야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한흥장 모텔은 인사동 3길에 있었다. 이제 막 리모델링을 했는지 전반적으로 깨끗하고 아담했다. 방들이 모두 2인 1실로 통일되어 있었다. 우리처럼 떼로 뭉쳐 잠자리를 잡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럴 것이다. 피곤이 몰려와서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인사동의 새벽은 한산했다. 길거리에는 사람의 왕래가 뜸했다. 밤거리 인파들이 지은 쓰레기를 치우는 미화원들만 바쁘다. 필방이며 지필묵, 기념품 가게 주인들이 물건을 진열하면서 오늘을 준비하고 있었다. 먹거리촌에서는 모락모락 솟아나오는 연기들로 지붕이며 담장이며 거리들이 뒤덮여 있었다. 어제의 풍요를 접고서 새롭게 오늘의 풍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사동은 아침에 요기를 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아침 자리를 보려고 거리를 돌아 다녔으나 어느 한 자리도 찾지 못했다. 마침 지나가는 우유 아줌마에게 물었더니 청진동으로나 가라는 것이다. 아침에는 사람의 왕래가 드물기 때문에 조찬할 곳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가볍게 요기할 곳으로 필방 2층에 있는 죽집을 알려 주었다. 일행을 인도하여 2층 <본죽> 집으로 갔다. 육순 정도의 주인 양반이 엽차를 내려놓으며 주문을 받는다. 바지락죽, 호박죽, 깨죽을 시켰는데 아침 뱃속을 달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억지로 따라온 일행도 있었는데 죽 맛이 그만 이라며 동조했다.
     죽집을 나와서 필방으로 갔다. 이 선비가 화선지를 산다고 해서 따라 간 것이다. 그리고 인사동 각처에 산재해 있는 박물관이며 전시장을 돌아보기로 했다. 인사동은 예술의 거리이기도 하다. 작품 활동하는 사람이면 인사동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화랑, 갤러리가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이다. 갤러리 중에는 대관화랑과 작품판매를 하는 두 종류의 화랑이 존재한다고 한다. 대관화랑으로는 공평아트센타, 수 갤러리, 가나아트, 부남 미술관, 덕원갤러리, 인사아트갤러리, 보다갤러리, 하나아트갤러리, 상갤러리 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을 직접 거래하는 화랑도 50여 곳이나 있다고 한다.
     인사동 갤러리, 화랑을 드나들면서 좋은 점은 입장료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친절하게 맞아 주는 작가나 안내원들이 있어서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인사동 갤러리가 운영되는 것은 젊은 작가들의 발표 무대로서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작가들은 대관료를 내고 전시회를 준비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담을 안고서 문화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는 공간으로 인사동을 택한다는 것이다. 수 갤러리, 가나아트, 부남 미술관, 인사아트 갤러리에 들어가서 여러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채화 단체전을 열고 있는 곳도 있었고 새해 희망을 담은 추상화 그림도 돋보였고 그릇장도 볼 수 있었다. 특히 폐타이어를 활용해서 여러 가지 동물들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인상적이었다. 유니콘, 소, 흑상어, 말, 뱀 등의 동물들을 새롭게 재조명했는데 특히 깊은 생각에 빠진 암사자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일반 화랑에도 들어가서 다양한 작가들의 그림이나 조각들을 감상했다. 생각보다 판매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다. 대개 50만원 이쪽저쪽인 유화나 한국화 작품들이 많았다. 옥을 새겨서 조각한 작품도 100여 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개인전에 가서 보면 보통 200만원을 넘어서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여기서는 아주 몸집을 줄인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는 것 같았다.
     발품을 팔면서 고서화나 골동품 가게도 돌아보았다. 칼 박물관에도 갔다. 청동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칼들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외국인 대상 관광 명품점도 돌아보고 인디아 찻집에 들어가서 색다른 맛을 즐기다 보니 인사동이 과거와 현재가 함께 어우러지는 만남의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인사동은 관광 명소로서 동양인, 서양인 할 것이 없이 외국인의 출입이 잦다. 그리고 꿈과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연인들의 1번지이기도 하면서 삶과 문화와 예술이 공유되는 창조의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동 4거리에서 잡화 가게를 한다는 아내 친구인 광희 씨도 만났다. 훤칠한 키에 삶의 경륜이 붙은 선이 굵은 얼굴이었다. 아내와 껴안고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직 물건을 정리를 하지 않았다며 미안해한다. 그러면서도 지난 시절 추억의 언어를 쉼 없이 쏟아낸다. 조금 있으면 남편이 오기로 했다며 점심을 푸짐하게 사겠다고 기다리란다. 주로 가방이며 모자를 팔고 있었는데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와서 이 물건 저 물건 만지면서 가격을 흥정한다. 외국인들도 많았다. 광희 씨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구사도 익숙했다. 비록 토막말이지만 서로 통해서 물건을 파는 데 지장이 없었다.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것저것 챙긴다.
     가게를 남편에게 맡기고 전통민속 식당인 <번지없는 주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민속 음식이나 술을 내는 식당이었다. 탁자나 의자, 바닥이며 벽 등을 나무로 꾸몄는데 공간 곳곳에 옛날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차림표를 보니 홍어찜, 낙지무침, 갈치구이, 삼계탕, 불고기 백반, 된장찌개, 순두부, 김치찌개, 청국장, 전주비빔밥 등 음식 종류가 다양했다. 가볍게 먹자며 낙지무침 하나와 청국장을 주문했다. 그리고 산사춘도 시켰다. 만남을 위하여 축배를 나누면서 사진도 찍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잡화 가게에서 광희 씨 내외와 헤어졌다. 오래도록 손을 흔들면서 아쉬워하는 광희 씨의 모습이 멀어진다. 꼭 피붙이와 헤어지는 것 같았다. 애틋한 정을 물씬물씬 풍기며 끝까지 함께 하려는 순수함이 내 눈에 반영되어서 그런지. 오고가는 인파 속에 광희 씨 내외가 묻히고 우리는 인사동을 벗어나서 시립문화미술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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