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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보다 무겁다
여성 정치인 박순천 생가 복원 사업을 보며
방학진 2010/09/15 02:19    

박순천
요즘 민주당은 차기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뽑는 전당대회 준비가 한창이다. 이번뿐이 아니라 매번 민주당 전당대회에 입후보한 후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민주당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하면서 거명하는 과거 정치인들이 있다. 신익희, 장면, 조병옥, 박순천, 윤보선, 정일형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이다.

박순천은 이렇듯 민주당의 정통을 이야기할 때마다 거론되는 걸출한 인물들 중에 유일한 여성이다. 50대 이상의 기성세대들은 5선 국회의원으로 민주당 총재를 지낸 한국 여성정치인 1호이자 야당 정치 지도자 박순천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광복절 직후 박순천(1898~1983)의 생가 복원을 두고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부산 기장군의회는 8월 16일 제159회 임시회 본회의를 열어 기장군이 추경예산으로 편성한 기장읍 대변리 박순천의 생가 땅 542㎡ 매입비 5억원을 격론 끝에 과반을 겨우 넘긴 찬성 4표, 반대 2표, 기권 1표로 승인했다. 어째서 ‘한국 여성정치인 1호이자 야당 정치 지도자’인 박순천의 생가 복원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유는 일제강점기 박순천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뒷 줄 왼쪽으로부터 박순천과 황신덕. 뒷 배경에 보국(報國, 나라의 은혜에 보답함)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들이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던 나라는 어디였을까?

어려서부터 기독교에 입교한 박순천은 부산진 일신여학교(현 부산 동래여고)를 졸업한 뒤에 마산의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박순천은 의신여학교 교사 재직 중 3.1 운동을 맞는다. 이 때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인 이갑성은 서울에서 마산으로 내려와 창신학교(현 창원 창신고) 교사로 있던 임학찬을 만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고,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배동석은 박순천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박순천은 마산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일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박순천은 이때부터 ‘순천댁’이라는 가명으로 도피생활을 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곧 신분이 탈로가 나고 만다. 만세운동 혐의로 복역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마친 박순천은 귀국 후 남편 변희용의 고향인 경남 고령에서 십년간 농촌계몽운동에 매진한 후,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로 올라온 직후인 1940년 10월 박순천은 황신덕 등과 함께 경성가정의숙(현 서울 중앙여고)을 설립했다. 초대 교장은 황신덕이 맡았고 박순천은 부교장을 비롯해 여러 직책을 을 역임했다. 경성가정의숙은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공의 처인 박찬주(박영효의 손녀)가 희사한 왕실재산을 기반으로 설립되었는데, 박순천은 일본으로 건너가 직접 이우공에게 학교 설립의 뜻을 밝히고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그였으니 학교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발 벗고 나서서 설립한 학교에 대한 애착은 이내 일제에 대한 협력의 길로 접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학교 설립 두 달 후인 1940년 12월 25일 경성 부민관에서 설립된 <황도학회>의 발기인을 시작으로 친일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이광수가 발기인 대표인 <황도학회>는 일제말기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황도사상을 교육․선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 “내선일제의 실천을 위해 일본정신을 깨닫고 황도정신을 받들자”는 취지를 밝히고 있으며 활동 내용으로는 1. 황도사상의 학습, 2. 황도정신의 일반에 대한 보급, 3.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로 정했다. 이 단체는 고사기(일본의 신화집으로 요즘도 일본에서는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고전문학 등에 등장한다), 일본서기, 칙어집(일본 천황의 담화문) 등을 학습교재로 사용했다.

“본시의 조선 사람 그대로는 황국신민이 될 수가 없다. 황도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우리는 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것이다. 황도학습은 참으로 긴요 절실한 바로서 이 사업의 지속 여하에 따라 내선일체의 완전한 실현의 지속이 결정될 것이며 고도국방국가의 국민으로서 반도인이 응분의 총력을 바칠 수 있다.” 이 내용은 <황도학회>의 설립취지문의 일부로 취지문 내용대로 황도학회는 매일 저녁 2시간씩 매주 4일간 대화숙에서 황도학습회를 개최하여 황도사상 보급에 주력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에 입문한 박순천이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를 주요 활동으로 삼은 황도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은 그의 변신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1965년 7월 20일, 당시 현안이었던 한일협정 비준문제와 월남파병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자리를 같이 한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와 친일부역자 박순천. 똑 같은 친일부역자들이 해방된 지 20년 만에 한 사람은 남한의 대통령으로 한 사람은 야당 당수로 국사를 논의했다는 자체가 한 편의 블랙코메디다. 더구나 그 주된 논의 내용이 한일협정 비준이었다니, 말 다했다.

황도학회 발기인을 시작으로 박순천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 연사에 이어 <조선임전보국단> 산하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참여하기에 이른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 10월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위해 임전대책협의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하여 결성된 전시체제기 최대의 친일 민간단체인데 부인대에는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고황경(서울여대 총장), 박마리아(자유당 시절 2인자인 이기붕 부인), 박인덕(인덕대 설립자), 배상명(상명대 설립자), 송금선(덕성여대 총장), 유각경(한국YWCA 창립), 이숙종(성신여대 설립자), 임숙재(숙명여대 총장), 임영신(중앙대 설립자), 황신덕(추계예대 설립자) 등 당대부터 해방 이후까지 한국 여성계를 주름잡은 인물들의 거의 망라되어 있다. 박순천은 전쟁이 장기화되자 부녀자와 여학생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각종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박순천의 친일행위 중 가장 회자되는 문제의 부분은 바로 자신의 제자를 근로정신대로 보내는 장면이다. 1943년 3월경 경성가정의숙 교장 황신덕과 함께 당시 부교장이던 박순천은 전교생을 모아놓고 학교를 살리기 위해 한명이라도 근로정신대에 지원해달라고 호소한다. 그 결과 당시 2학년으로 18세이던 김금진 학생이 지원자로 나선다. 이 같은 사연은 1992년 6월 5일자 주간지 뉴스메이커(현 위클리 경향)에 자세히 소개된 바 있는데 보도 기사와 함께 실린 당시의 사진 한 장은 두고두고 황신덕과 박순천의 친일행적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소개되고 있다. 즉 머리에 일장기를 두른 김금진 학생을 중심으로 황신덕, 박순천 등 조선인과 일본인 교사 등이 찍은 기념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가운데가 당시의 김금진. 그 오른쪽이 황신덕. 뒷 줄 맨 왼쪽이 박순천이다.
황신덕 교장 등은 몇 날 며칠을 눈물까지 흘리며 학생들에게 호소했고, 순간 학교를 살려야겠다고 다짐한 김금진이 근로정신대에 지원했다. 지원한 바로 그날 기념사진을 찍게 된다.

그 후 김금진은 일본 토야마현 후지코시의 총알 만드는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해방 때까지 고초를 겪는다. 대부분 12~13세의 소녀였고 자신과 같은 여고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김금진은 2년여 동안 한 차례도 생리를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지만 오히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았음을 안도했다. 김금진은 너무 억울한 마음에 당시 화곡동 같은 동네에 살던 박순천이 사망한 소식을 듣고도 문상을 가지 않았다. 제자를 사지로 보내놓고도 해방 후 찾아보기는커녕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박순천을 김금진은 스승으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가 복원사업에 대해 기장군 관계자는 “향토인물이자 독립운동가인 박 여사의 생가가 방치돼서는 안 된다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고, 현재 부지가 사유지여서 기념사업에 앞서 부지매입부터 마무리 짓는 것이 시급하다”며 “박 여사의 ‘과’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공’이 훨씬 많은 만큼 사업추진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사람을, 그것도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를 사지로 보내놓은 이의 ‘과’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공’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보다 무겁다’는 말을 기장군 관계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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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인 방학진님은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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