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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아주 신중한 이름이 아닌가!
신흥무관학교 100년을 생각하며
방학진 2010/07/06 17:14    

프랑스와 영국이 백년전쟁 중이었던 1347년, 프랑스 남부 해안 도시 칼레를 포위한 영국군은 ‘만약 칼레시를 대표하는 여섯 명이 목숨을 내놓으면 나머지 모든 시민을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서슬 퍼런 영국군대 앞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여섯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칼레시를 대표하는 귀족들이었다. 로뎅의 조각 작품인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죽음의 공포 앞에서 고뇌하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다. 100년 전 우리에게도 ‘칼레의 시민’을 떠올릴 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되자 돈과 권력을 모두 버리고 망명길을 택했던 이회영을 비롯한 여섯 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들이다.

강제병합 직후 많은 양반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제에 협력하고, 일제 역시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선전하던 때 이회영은 1910년 8월 만주 서간도 지역을 둘러보고 돌아온 뒤, 가족회의를 열어 가문의 집단 망명계획을 논의했다. 이들 여섯 형제는 교목세신(喬木世臣) 즉 집안 대대로 중요한 지위에 있어,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는 신하로서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지언정, 집안이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하게 도모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뜻을 모으고 집단 망명에 합의했다.

이회영, 이시영 선생(왼쪽 김구 선생 옆)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은 이들 여섯 형제들의 10대조며, 5대조 이종성은 영조 때 영의정을, 이들 형제의 아버지 이유승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둘째 이석영이 양자로 들어간 이유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니 그야말로 이회영 집안은 당대 최고의 가문이었다. 이회영을 비롯한 여섯 형제가 살던 옛터는 지금의 명동 YWCA가 있는 약 6천여 평 일대였다. 일제는 이들 형제가 망명하자 이들이 살던 집을 몰수해 일본의 애국부인회로 기증하였고, 애국부인회는 다시 일본 YWCA 경성본부에 기증하였다. 해방이 되자 이 재산은 한국 YWCA로 넘어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들 여섯 형제들은 얼음과 눈길을 뚫고 압록강을 건넜으며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일까. 바로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일제와 무장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인 1911년 6월 10일 세워진 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다. (개교 당시 명칭은 신흥강습소)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지역 추가가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열린 개교식이었지만 10 여 년 동안 이곳에서 배출한 3,500여 명이 넘는 졸업생들과 교관들은 청산리전투를 비롯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뿐만 아니라 만주와 노령 및 중국 관내의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고려혁명군, 한국광복군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훈련 중인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초대교장을 지낸 이동녕이 조회 때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에게 역설한 말 속에 이들의 정신이 담겨 있다.

“대한의 청년동지 여러분! 지금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추운 땅 만주에서 무관학교를 세우고 소정의 교육을 받는 것은 조국의 다시 찾겠다는 군인 정신의 총화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견디는 고된 훈련을 통해 강인한 체력과 인내심을 길러 무관으로서의 기백과 담력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이범석, 고려혁명군 장군을 지낸 김경천 등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이며 특히 님 웨일즈의 <아리랑>으로 유명한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도 이곳을 찾았다는 데 그는 동경 유학 생활을 청산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와 이곳에서 혁명가의 꿈을 키웠다.

신흥무관학교! 아주 신중한 이름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자 사람들은 겨우 15살밖에 안된 꼬마였던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입학자격 최저 연령이 18살이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엉엉 울었다. 내 기나긴 순례 여행의 모든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학교 측은 나를 예외로 대우하여 시험을 칠 수 있게 했다. 지리·수학·국어에서는 합격하였지만, 국사와 엄격한 신체검사에서는 떨어졌다. 다행히 3개월 코스에 입학하도록 허락 받았고 수업료도 면제받았다.

김산
학교는 산 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게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18살에서 30살까지의 학생들이 100명 가까이 입학하였다. 학생들 말로는, 이제까지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 중에 내가 제일 어리다고 하였다. 일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여, 취침은 저녁 9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도 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였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른바 게릴라 전술 훈련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강철 같은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등산에는 오래 전부터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학우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그들을 뒤따라갈 수 있었다.

우리는 등에다 돌을 지고 걷는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아무 것도 지지 않았을 때에는 아주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그 날’을 위해 조선의 지세, 특히 북조선의 지리에 관해서는 주의 깊게 연구하였다. 방과 후에 나는 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얼마간의 훈련을 받고 나자, 나도 힘든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으며, 그러자 훈련이 즐거워졌다. 봄이면 산이 매우 아름다웠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으며 기대에 넘쳐 눈이 빛났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할쏘냐? (김산, 님 웨일즈의 <아리랑> 중에서)


오늘 날 우리나라 헌법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명시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대한민국의 육해공군 사관학교의 역사는 신흥무관학교에서 찾는 것이 정상적일 것이다. 그러면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는 자신들의 뿌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육사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45년 12월 5일에 문을 연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와도 관계가 깊다. … 사설 및 유사 군사단체와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경력을 쌓은 수많은 자원들이 있었지만 제각기 다른 군사적 배경과 경력을 가진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통일된 교육을 실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당시의 군 당국은 미국식 군사제도와 교리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후 우선적으로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 군정청과의 원활한 협조에 필요한 위한 통역관을 양성하는 일이 시급했으며... (육군사관학교 누리집에서)


일제시대에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경력을 쌓은 수많은 자원들’을 모아 ‘미 군정청과의 원활한 협조에 필요한 위한 통역관을 양성’을 위해 만든 군사영어학교를 육사의 뿌리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군사영어학교의 교장은 리스 미군 소령이었고 부교장은 대표적인 친일군인 원용덕이었다.

이회영의 동생이며 신흥무관학교 2대 교장을 역임하고 해방 후 부통령이 된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는 우리 민족 최초의 사관 집단 육성소로서 그 정신이 곧 애국 애족의 효시요 요람인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내년 6월이면 신흥무관학교 100년이다. 몇몇 인사들이 소박하게나마 100주년 행사를 준비 중이다. 대한민국 사관학교 생도들이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배울 날은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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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인 방학진님은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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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의견 목록
1 . 진정한 명문가라 오거리 2010-07-12 / 15:33
2 . 일그러진 우리의 역사.. 율전 2010-07-12 /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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