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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에 부역한 친일파들
5ㆍ18 30주년이 공허한 이유
방학진 2010/05/12 13:36    

우리는 지난날 일제의 굴레 아래서, 외세에 의한 국토분단의 비극에서, 그리고 대국주의의 질주에서 숱한 좌절과 고초를 맛보았다. 인류보편의 가치라는 민주주의를 추구했으나 이 땅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시련과 진통을 거듭했다. … 헌법을 준수하여 독재와 1인 장기집권을 막고 자유와 평등의 대도를 닦는 참다운 민주주의 길을 열어가려고 한다. … 우리는 국민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하며 민중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민중의 편에 서서 쉬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이제 민주와 정의의 횃불은 올랐다. … 역사는 언제나 정의의 편임을 굳게 믿자!

이 글은 우리나라 어느 정당의 창당 발기 선언문이다. 오늘 날 어느 진보정당의 그것에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내용이 선명하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이 선언문은 민주정의당 창당 발기 선언문의 일부이다. 바로 광주 시민들의 피 위에서 만들어진 전두환이 만든 그 ‘민정당’ 말이다. 얼마 전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만끽하며 청와대에 초대되어 진상도 밝혀지지 않은 천안함 문제에 대해 “100% 북한 소행”이라며 거들먹거리는 전두환을 보면서 5ㆍ18 30주년을 맞아 그가 화려하게 컴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6․25를 제외하고 5․18만큼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린 사건도 없다. 그런데도 그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토록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으니 과연 평화애호민족답다.

4․19와 마찬가지로 5․18도 일부 정치인들의 부적절한 거래로 인해 박제화가 된 지 오래다. 김주열 열사의 마산상고 입학동기이며 마산지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김영만 선생은 올해 3․15와 4․19만큼 가슴 답답한 때가 없었다고 한다. “3․15와 4․19 50주년을 맞아 많은 언론에서 관련자들을 인터뷰했는데, 인터뷰에 등장한 사람들 중 대부분이 시종일관 지조를 지키고 산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이 언론 인터뷰를 극도로 피했다고 한다.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 어디 4․19뿐이랴. 전두환이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키고, 전두환의 거수기로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서 각각 입법위원과 재무위원으로 활동한 이경숙과 한승수가 이명박 정부의 정권인수위원장과 국무총리를 버젓이 지내고 있으니 5․18도 4․19 못지않게 농락당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 달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 중 전두환 정권에 협력한 자들을 살펴보자.

총 15명인 민정당 발기인 명단을 보면 가장 맨 먼저 윤길중(1916~2001)이 등장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윤길중의 이름을 보고 의아해 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승만에 의해 부당하게 사형당한 조봉암의 진보당 결성에 적극 관여해 고초를 치렀고 4․19 이후 사회대중당 결성, 다시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박정희에 의해 6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혁신계열에서 활동한 윤길중은 그 후 야당인 신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지내다 1976년부터는 정계를 떠나 변호사로 활동해 왔다. 그러던 그가 국보위 입법위원과 민정당 창당 발기인으로 등장했으니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변신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윤길중은 민정당 소속으로 세 차례 국회의원을 하고 국회 부의장까지 지내며 민정당의 얼굴마담 노릇을 톡톡히 했다. 1990년에는 야3당이 야합한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을 맡기도 했다.

함남 북청에서 태어난 윤길중은 23살 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고, 잇따라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합격했다. 즉 법조인과 행정관료의 길 어디든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행정관료의 길을 선택했고 강진군수와 무안군수를 거쳐 해방 직전 총독부 학무국 사무관으로 해방을 맞았다.

민정당 전남 조직책으로 활동한 정래혁(1926~ )은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1945년 6월 일본 육사 58기로 졸업한 그는 박정희의 일본 육사 1년 후배이다. 일본 육사 출신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정래혁 역시 6․25와 5․16을 거치며 승승장구한다. 박정희정권 아래서 상공부장관, 한전 사장, 국방부장관과 두 차례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군대 후배인 전두환의 출현으로 국보위 입법회의 부의장과 민정당 전남 조직책을 지내며 민정당 창당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국회의장과 민정당 대표위원까지 오른다. 영호남 지역감정을 희석시킨다는 명분으로 중용된 정래혁의 승승장구는 1984년 부정축재와 관련한 투서사건으로 일단 끝나지만 특별히 사법처리를 받지는 않았다.

5.18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전두환 정권은 국정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여론 주도층들을 포섭하고 나선다. 고재필(1913~2005)은 1980년 12월부터 전두환이 물러나는 1988년 2월까지 국정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전두환 정권의 방패막이 노릇을 한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고재필은 일본 주오대학 졸업 후 만주로 건너가 일제가 세운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의 고위관료 양성기관인 대동학원에 입학, 1939년 11기 졸업한다. 최규하의 대동학원 4년 선배인 셈이다. 해방 때까지 그는 만주국의 행정부 격인 국무원에서 주로 경제부문에서 일했다. 해방 후 유진오의 발탁으로 공직에 들어온 그는 박정희정권 당시 여러 번 국회의원을 지냈고 두 차례나 장관을 지냈으며 1993년에는 전직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헌정회 부회장을 지냈다.

“전대통령 지휘 하에 활동했던 국보위의 여러 가지 과감한 조치는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국민정신개조의 전주곡이 아니었던가 싶다. 권력형 부조리, 공직자의 비위, 불량배의 과외수업, 저속한 잡지와 출판 등에 대한 대담한 척결은 … 국민정신의 개조라는 면에서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문화의 창달 : 전 대통령 취임사를 보고 - 동아일보 1980년 9월 6일)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폭력이다. … 폭력을 싫어하는 까닭은 그것이 반지성적인 야만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 이번에 국보위에서 깡패를 일제히 그리고 철저히 소탕한다고 한다. 쌍수를 들어 환영해 마지않는다. … 깡패소탕작전은 꾸준히 지속되어야 할 것이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요인도 이 기회에 없애버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데모’라는 최후적인 폭력적 방법도 우리 사회에서는 사라질 것이 아닌가.” (깡패소탕은 지속적으로 - 중앙일보 1980년 8월 4일)

선량한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다 삼청교육대에서 수도 없이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행위를 ‘불량배의 과외수업’으로 표현하고 야만적인 폭력으로 집권한 자들에 저항한 5․18 민중항쟁을 도리어 ‘폭력’과 깡패들의 소행으로 몰아붙인 이 자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지낸 조연현(1920~1981)이다.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 하얼빈대학을 약 1년 정도 다니다 귀국해 혜화전문학교(오늘 날 동국대학교)에 입학한다. 그 후로 조연현은 시종일관 노골적인 친일 시와 친일 비평을 쏟아낸다. 태평양전쟁을 정당화하는 글에서 그는 “우리는 절대로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동양지광 1942년 5월호)

해방 후 우익문화단체 발족에 참여한 그는 1970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장 시절 ‘극영화 시나리오 사전 심의제’라는 검열제도 시행을 주도했고, 1975년부터 1976년에는 ‘가요정화 조치’를 주도해 수많은 금지곡을 양산한 장본인이다. 전두환 정권 출범과 더불어 신군부에 대한 아부에 극치를 달리던 그는 그만 1981년 11월 사망하지만 한국문인협회는 이듬해부터 ‘조연현문학상’을 제정해 현재까지 시상해 오고 있다.

신군부의 학살행위를 미화하고 그들의 집권을 정당화하는데 기꺼이 앞장 선 인사들에 대한 ‘응징’은 얼마나 더 긴 시간이 걸릴까 생각하니 5ㆍ18 30주년이 오히려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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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인 방학진님은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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