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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에는 짝퉁이 있게 마련
친북·반국가 행위자 명단 발표를 보며
방학진 2010/03/19 01:03    

지난 12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www.crnn.org 위원장 고영주)라는 단체가 이른 바 ‘친북·반국가 행위자’라면서 각계 인사 10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친북·반국가 행위 대상자 5000명 가운데 현재 활동 중이고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사 100명을 우선 선정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때는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된 작년 말부터이다. 작년 11월 26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주최로 ‘친북·반국가 행위자 인명사전(일명 친북인명사전) 편찬 관련 기자회견’이 열렸는데, 일부 참석자들이 ‘고인이 된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명단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발언을 듣고 분개하여 연단 앞으로 나와 거세게 항의하며 주최 측과 몸싸움을 벌여 기자회견장이 난장판이 된 적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행태를 두고 언론에서는 기자회견장이 ‘우익 싸움장’이 되었다고 조롱한 바 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좀 잠잠한가 싶더니 기어이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가 일을 내고 말았다. 이 단체가 밝힌 명단에는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권영길 민노당 의원, 최규식 민주당 의원 등 정·관계 인사 14명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소설가 조정래씨 등 문화·언론계 인사 13명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변호사) 등 법조계 인사 3명 △강정구 동국대 교수,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 학계 인사 14명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한상범, 임헌영 전·현직 민족문제연구소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이규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의장 등 진보개혁진영 인사들도 대거 포함됐다. 아무런 설명 없이 이 명단만 놓고 본다면 그저 명망 있는 민주화운동 인사들 명단을 나열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단체 누리집에 들어가 보면 <친북인명사전>에 대한 별도의 코너가 있는데, 아주 낯익은 표현들을 만날 수 있다. 편찬취지, 경과, 편찬절차, 선정기준, 향후 편찬일정, 명단발표, 이의신청 등. <친일인명사전> 편찬 자료집을 상당부분 차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의 작업이 그리 빛을 볼 것 같지는 않다. 우선 자신들의 우군이라 할 수 있는 세계일보와 동아일보조차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 간에 불신감만 조장하는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낙인찍기와 편 가르기로 이념 논쟁의 불을 지펴선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는 갈등 요소가 너무나 많다. (세계일보 3월 15일자 사설 “친북·반국가 행위자 명단 발표 문제 있다”)

5000명의 조사 대상자 중 100명이 선정된 경위도 모호하다. 추진위는 기존 인터뷰나 논문 등 ‘증거 자료’를 토대로 총 5000명 중 100명을 포함시켰다고 하지만 50여 명의 지도위원과 집필위원이 어떤 과정을 거쳐 100명의 명단 대상자를 공개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제대로 조사한 뒤 한꺼번에 발표해도 될 일을 서둘러 발표한 배경과 선정 기준을 놓고도 의문이 많다. 편집위원인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기자회견에서 “친북·반국가 성향이 덜해도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사람을 첫 발표에 실었다”고 말했다. 단체 스스로 ‘선정 기준’을 부정한 셈이다.(동아일보 3월 15일자 기사 “친북 인사 공개, 설득력 얻으려면…”)

사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구성원의 면면을 살펴보면 과거 공안정국 때 활약한 인사들의 이름이 전면에 등장한다. 위원장을 맡고 있는 고영주 변호사는 20년 넘게 검사생활을 하면서 출세루트라는 공안검사(1995년~1998년 대검찰청 공안기획관으로 재직)로 이름을 날리다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공안검사들이 과거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사표를 내고 나온 인사이다. 그가 사표를 내기 직전에 지휘한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이장희 외국어대 교수의 저서 <나는야 통일1세대>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이장희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1995년 3월, 당시 천재교육 발행인이 생각이 깨인 사람이라 독일 통일 이후 한반도 통일에 대한 어린이용 통일교육서가 필요하다며 경실련으로 협조 공문을 보냈다.(당시 이장희 교수는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였음 - 글쓴이 주) 그래서 내가 집필한 <나는야 통일1세대>가 그 해 9월에 발간됐는데, 통일부 추천도서로 지정되는 등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철이 되면서 ‘색깔론’ 시비에 휘말려 이적도서로 규정됐고 수사를 받게 된 것이다.”

이장희 교수는 이와 관련해서 당시 황당한 경험을 했다. 1997년 국제 학술대회를 다녀오던 이장희 교수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 강제연행 당했다. <나는야 통일 1세대>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는 이유였다. ‘통일부 권장도서’로까지 선정됐던 책이 출판된 지 2년이 지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이적표현물로 변한 것이다. 결국 6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2003년 대법원은 이장희 교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6년 동안 그가 겪은 고초는 아무도 보상해 주지 않았고 호소할 길도 없었다.
고영주 외에도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세력들을 친북으로 매도하는 이데올로그 구실을 충실히 수행한 인물이며 이동복 전 자민련 의원은 박정희 시절 남북문제를 담당한 대표적 반통일 인물이기도 하다.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온 지 넉 달이 지났지만, 사실관계가 틀리다거나 내용에 대한 반박을 해온 기관이나 단체는 단 한곳도 없다. 발간 당시 핏대를 세워 가며 반대 목소리를 내던 조중동 또한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다. 넉 달 동안 <친일인명사전>의 허점을 찾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을 텐데 말이다. 반민특위를 반대했던 이승만 정권 때나 지금이나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논리는 크게 3가지다. ‘색깔론’, ‘시기상조론’, ‘국론분열론’. 입만 열고 글만 쓰면 놀라운 논리는 제조해 내는 조갑제는 “친북이 친일보다 더 나쁘다”고 외쳐댔지만 이에 호응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특히 최근 거대 언론들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가운데 MB의 독도발언으로 댓글을 7만개 나 달면서 분개하는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조갑제 식의 또는 고영주 식의 한물 간 색깔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친북인명사전> 소동이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가치만 더욱 높여줄 따름이다. ‘명품에는 짝퉁이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 뱀발 : 진보개혁진영 일부에서는 <친북인명사전>에 이름이 없는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나도 더욱 분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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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인 방학진님은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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