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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가스실 만큼이나 살인적인 말들이 있다”
친일반민규명위원회의 장지연 친일 조사 제외를 보고
방학진 2009/09/1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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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부대 토벌하던 간도특설대 출신을 ..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 바 우리정부의 대신이란 자가 영리를 바라고 협박이 무서워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어, 4천년 강토와 5백년 이어온 나라를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명을 남의 노예로 내몰았으니…”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사흘 후인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1864~1921)의 대표적 항일 논설인 ‘시일야방성대곡’(오늘에 이르러 목 놓아 통곡하노라)의 일부이다. 이 논설로 장지연은 신문이 나오자마자 새벽 5시에 체포되는 수난을 겪는다. 우리가 흔히 항일 노래하면 홍난파의 ‘봉선화’(이 노래가 항일과는 무관한 것임을 작은책 2007년 9월호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를 떠올리듯 항일 논설하면 대부분 ‘시일야방성대곡’을 떠올릴 것이다.

을사늑약 체결 후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

그러한 명성과 상징성 때문에 오랫동안 장지연의 이름을 딴 상도 있다. 현 MBC 엄기영 사장도 2000년 ‘장지연 상’을 수상한 사실을 보면 언론인에게는 그만큼 영광스런 상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2005년 역사학자 김경현 씨에 의해 장지연의 숨겨진 친일행적이 하나 둘 공개되면서 급기야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장지연 상’을 주최해 오던 한국언론재단은 공동주최를 철회하기도 했다. 거론되고 있는 장지연의 친일행적 중 주요한 부분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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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진주에서 <경남일보> 주필을 지낼 때 이토 히로부미 추모시와 일왕 메이지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기념시를 실었고, 이후 신문사가 신문 발행을 쉬면서까지 노골적인 친일 기념행사를 열 때 방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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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친일승려 이회광의 주도로 조직된 친일불교단체인 불교진흥회의 간사로 등록돼 있다. 불교진흥회는 이완용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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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하세가와 총독 환영시를 쓰는 등 여러 차례 일제를 찬양하는 시와 글을 실었다.

즉 장지연은 안타깝게도 말년까지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던 지조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사실 일제 때 독립운동가나 항일지사 중 초심을 지키지 못하고 변절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장지연의 경우처럼 사람들에게 항일 언론인의 상징으로 되어 있는 인물의 경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2005년 당시 장지연의 친일행적이 불거지자 유족 측은 김경현 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으로 고소하기도 했지만 결국 사건은 무혐의 처리되었고, 한동안 장지연의 친일행적 논란은 잠잠해졌다.

장지연(張志淵)
그러다가 최근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상규명위원회(줄임말 : 반민규명위 / 2005년 5월 출범)가 장지연을 친일행위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밝히면서 다시 그의 친일행적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반민규명위는 “유족들의 이의신청 내용을 검토한 결과, 여러 정황상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엄격히 적용하기에는 무리한 점이 인정돼 장지연을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말했다. 즉 친일행위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특별법이 정한 친일행위자의 범위에는 미달된다는 것이다. 이를 법률 용어로 비유하자면 ‘기소유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민규명위의 제외 결정에도 불구하고 올 가을 발간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장지연은 제외되지 않을 것이다. 이를 두고 <조선일보>는 기다려다는 듯 사설까지 동원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작업을 폄하하고 나섰다.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군화와 총검으로, 이어서는 고문과 징역으로 짓밟으며 2000만 국민의 목을 조이던 시절에 생을 영위한 조선 사람의 일생을 100년이 흐른 후 오늘의 기준으로 재단한다는 것은 이만큼 위태롭고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운 일이다.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의 부분적 행적에 매달릴 게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그가 한 일을 종합해 균형 있게 본 후 내려져야 한다. …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장지연과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등 4430명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의 올해 안 출판을 강행할 것이라고 한다. 정권이나 권력이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 개입하고 대한민국 역사를 굴절된 시각으로 보는 특정 이념 성향의 학자와 시민단체가 편을 지어 자기들의 색깔로 역사를 개찬하는 일을 언제까지 되풀이해도 되는 것인가를 생각할 때다.” (2009년 8월 31일자)


친일문제만 나오면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조선일보>의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반민규명위가 장지연을 친일행위 조사 대상에서 제외한 것을 두고 많은 분들이 혼란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문제는 반민규명위 출범 전부터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즉 반민규명위의 출범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부터 애써 외면해온 친일파 문제를-한시적인 위원회이긴 하지만- 정부가 처음으로 조사하고 나섰다는 데 의의가 분명히 크지만 1991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민간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친일문제 연구가 반드시 국가의 그것과 같은 결론을 내야할 이유와 필요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기관과 민간기관의 결론이 같다면 굳이 두 기관이 같은 작업을 할 필요가 더더욱 없지 않은가. 역사책의 경우를 보더라도 필자에 따라 같은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가 차이가 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지적하자면 여야 합의로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친일반민족행위의 폭을 상당히 좁혀놓아 당시에도 큰 논란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장지연의 경우 특별법 제2조에서는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로 규정하고 있어 장지연의 문필활동이 ‘적극’ 협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의 경우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그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다는 원칙에 따라 사전에 수록되는 것이다. 사회적 영향력이 책임성이 요구되는 지식인(언론, 문화예술인 등)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거운 책임을 묻는 점은 나치 치하를 경험한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드골은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을 포함한 지식인들을 무려 99만 명이나 구속한 사실이 바로 그러하다. 특히 촉망받던 35살의 언론인으로 나치에 협력한 로베르 브라지야크를 기소하면서 당시 검사는 이렇게 논고했다. “브라지야크의 반역은 무엇보다도 지성의 반역입니다. 자존심의 반역입니다.” 또한 같은 문인이었으며 여성운동가 유명한 보부아르는 브라지야크의 사면 탄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히틀러의 선전자들을 엄벌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말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 독가스실 만큼이나 살인적인 말들이 있다.”

일제 말시 조선인구가 약 2천만명이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분이 약 1만명이다. 반민규명위는 약 1천명 정도를 친일행위자로 보고할 전망이다. 그렇다면 일제 당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비율이 10: 1이라는 것이다.

친일파보다 독립운동가들이 10배가 많았는데 우리는 왜 꼬박 35년 동안 식민지를 면치 못한 것일까.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그렇게 무능했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35년 동안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협력했지만 해방 후 60년 넘게 이 문제를 방치한 과정에서 그들의 죄상을 밝힐 만한 자료와 증언자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간 안타까운 결과일 뿐이다.

너무 많이 늦었지만 반민규명위가 국가의 이름으로 1000여 명이라도 친일행위자를 조사해 보고하는 것은 그것대로 의미 있는 일이다. 더불어 민간연구기관에서 객관적 사료를 바탕으로 4000여 명의 친일행위자를 밝히는 것도 역시 의미 있는 작업이다. 따라서 1000여명에 혹은 4000여 명의 명단에 없다고 하여 곧바로 면죄부를 발급받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장지연의 경우도 반민규명위에서 제외되었다는 것 자체가 법률적 표현으로 ‘무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반민규명위의 조사 제외 결정이 나오자 몇몇 사람들은 곧바로 장지연에 대한 일련의 기념사업 부활을 주장하는 모양이지만 엄연히 그의 친일행위는 명백하기에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 그에 대한 기념사업 부활 운운은 섣부르고도 부적절하다.


< 필자인 방학진님은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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