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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에 부활한 ‘보도지침’
이승만정권이 친일파 청산에 노력했다고?
방학진 2009/08/24 16:14    

참여정부 집권 말기인 2007년 2월 28일 당시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과학기술부)는 현행 7차 교육과정을 일부 개정했다. 그 내용을 보면, 국사와 세계사 내용을 통합하여 ‘역사’ 과목으로 독립 편성하고, 고등학교 1학년 수업시수를 1시간 추가 편성하였으며, 고교 선택과목으로 ‘한국문화사’, ‘세계 역사의 이해’, ‘동아시아사’를 신설한 것이다. 새 역사교과서는 중2·고1학년은 2011년, 중3학년은 2012년부터 사용한다.

물론 국사를 세계사와 통합하여 독립 편성한 것이나 새로 신설한 선택과목이 적절한 것인지는 당시에도 이론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학계의 숙원이었던 교과서 발행제도를 검정으로 전환하여 교과서 개발자의 재량권을 확대하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은 긍정적이라는 반응이었다. 즉 천편일률적인 내용에 암기과목이요 비인기 과목으로 전락한 역사 과목을 필자들의 개성이 톡톡 묻어나는 흥미진진한 과목으로 만들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권 초부터 유독 역사와 이념 문제에 집착해 오면서 기존 역사 교과서 필자들을 마녀사냥하듯 들볶던 이명박정권이 새로 개편될 역사 교과서를 가만 둘리 만무하다. 지난 8월 4일 교과부가 발표한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안)’에는 그들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우선 교과부가 발표한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안)’ 발표 자체가 모순이며 웃음거리다. 세계적으로도 용도 폐기된 지 오래인 국정 역사교과서 체제를 늦게나마 검정으로 전환하자는 것이 지난 2007년 개정의 핵심이다. 그런데 검정 교과서 집필을 일일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가이드라인을 정한 것은 겉으로는 검정이되 내용은 결국 국정 체제 그대로인 셈이다. 이는 마치 직장 부하들과 중국집에 가서 비싼 것 시키라고 말하면서 본인은 정작 자장면 시켜놓고 부하들에게 눈치 주는 상사와 같은 심보이다. 교과부는 이런 모순이 스스로 좀 겸연쩍었는지 다음과 같은 변명을 하고 있다.

개정 교육과정의 취지를 살려 교과서 내용과 구성을 다방면으로 편성ㆍ집필하는 것은 교육의 다양성 측면에서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교육 내용의 선정과 조직은 교육과정에 따를 문제지만 해석의 편차가 큰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 적정한 기준이 필요하다. 이는 국가 수준의 학습 평가의 시행에도 필요한 조건이다.


‘해석의 편차가 큰 역사적 사실’들 때문에 역사과목을 국정이 아닌 검정으로 바꾸는 것이다. 가령 이번 기준안에서 가장 문제로 지적받고 있는 해방 후 친일파 청산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교과부가 발표한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안)’에 따른 변화

기준안에는 이 문제에 대해 “대한민국은 이후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친일파 청산에 노력하였음을 서술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뉴라이트와 이명박정권의 관점에서는 이승만정권이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친일파 청산에 노력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반민특위 설치부터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해체당할 때까지 이승만정권은 무관심이 아닌 적극적 반대자였음이 과거부터 최근에 이르는 일관된 연구 성과이다. 이승만정권이 친일파 청산에 노력했다는 그 어떤 연구 논문이나 칼럼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심지어 기준안에서는 서술방향이라고 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연구자들 간에 서로 해석을 달리하는 내용일 경우 학계에서 널리 인정을 하는 이른바 정통적인 학설을 수록한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이 친일파 청산에 노력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는 정통학설이기는커녕 존재하지도 않는 학설이다.

또한 ‘국가 수준의 학습 평가의 시행에도 필요한 조건’이라는 대목은 한 가지 관점(시각)만을 갖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에 노력하지 않았다고 답하면 아마도 그 사람은 상급학교 진학이나 공무원되기 어렵게 만들겠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교과부는 ‘이러한 인식의 공감대를 배경으로 하여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제시한다.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은 역사학계의 전문가 및 역사 교육과정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여 연구진이 집필 기준을 작성하였으며, 공청회와 전문가 협의회, 교육과정심의회를 거쳐 내용을 조정하였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정말 ‘눈 가리고 아웅’하는 차원을 넘어 국민을 바보로 아는 처사이다.

작년 말 교과부는 뉴라이트 성향의 학자들로 역사교과전문가협의회란 것을 만들어 6개의 근현대 역사교과서 내용 중 55곳에 대해 ‘수정권고’를 했다. 사실상의 명령과 다름없었고, 필자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이로 인해 진보뿐 아니라 보수 역사학계 또한 교과부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해당 필자들은 현재도 법정에서 이 문제를 다투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공감대’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기준안에서 친일파 청산 부분과 더불어 비판받고 있는 부분은 ‘대한민국이 성취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상관 관계가 있음도 서술한다’는 대목이다. 이 문장만 놓고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문장이 삽입된 부분은 <5. 경제 개발과 자본주의 발달>이란 항목으로 1960-70년대 즉 박정희정권 시기 경제 성장의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생뚱맞게 맨 마지막에 이 문장이 삽입되어 있다. 즉 ‘한국 민주주의가 경제 발전 없이 가능했겠는가’라는 전경련식의 인식을 살짝 집어넣은 것이다.

듣자니 우리나라 인권위원회가 역사는 짧지만 세계적 수준으로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국가인권기구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 후보국으로 유력했으나, 인권의 문외한인 현병철씨가 새 인권위원장이 되면서 스스로 의장국 후보를 포기했다고 한다.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안을 보면서 문득 최근 새로 취임한 인권위원장 생각이 들었다. 즉 시스템은 선진국형인데 내용은 후진국형을 면치 못하는 모습 말이다.

교과부는 국정에서 검정으로 역사 교과서 체제가 변화된 것으로 놓고 ‘우리 학계 및 교육계의 역량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곧이어 ‘기대만큼이나 다소 우려스러운 점도 있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그 우려의 결과가 바로 이번 기준안이다. 교과부의 인식은 아직도 ‘조선인은 미개하고 게으르고 무능하다. 따라서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것은 어린 아이를 물가의 혼자 내버려 두는 것과 같다’하여 독립불가론을 피력하던 일본인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올 들어 이명박정권의 행보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치가 아닌 통치다. 말 잘 듣는 자들에겐 곧바로 한자리 주고, 반대파들에겐 가혹한 응징을 가한다. 과거 언론계에는 보도지침이 있었듯 이번 기준안이 바로 역사학계에 내려진 보도지침이나 다름 아니기 때문에 많은 역사교과서 집필자들은 저항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기준안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명박정권의 명령에 저항할 역사교과서 출판사는 없을 것이다. 결국 여러 권의 역사교과서들이 출판되더라도 내용은 기준안을 충실히 따를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안을 바꾸는 노력도 해야 하지만 더불어 역사교사와 역사학자들이 나서야 한다. 진정한 역사교육이 교실에서만 이뤄지지 않듯 스스로 학생들과 역사와 삶의 현장을 누벼야 한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많은 학생들이 ‘친일문학론’을,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리영희의 책들을 읽고 진실에 눈 뜨던 시절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대한민국은 어디든 살아 있는 거대한 역사교실이 아니던가.


< 필자인 방학진님은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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