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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부대 토벌하던 간도특설대 출신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려는 국방부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를 반대한다
방학진 2009/04/17 04:33    

국방부가 내년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참전자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 백선엽(89) 예비역 대장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물론 남북화해와 평화공존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거꾸로 돌리고 싶은 국방부의 간절한 소망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 보도가 나오자마자 백선엽의 친일행적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급격히 번지며 국방부의 행태에 비난이 쏟아졌다. 자신들의 자랑스런 원로인 백선엽을 위한다는 것이 그만 망신을 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일본에서 출간된 백선엽의 회고록과 회상록

이 처럼 백선엽의 친일행적이 상대적으로 소상하게 널리 알려진 이유는 아마도 ‘실록 지리산’과 ‘군과 나’라는 자서전 때문일 것이다. ‘실록 지리산’은 여수ㆍ순천 사건 직후인 1949년 7월부터 1950년 4월까지 백선엽이 광주 주둔 제5사단장으로 발령받아, 직접 서남지구 빨치산 토벌을 지휘하면서 겪은 이야기며, ‘군과 나’는 6ㆍ25전쟁을 비롯한 자신의 군 생활 전반을 다룬 회고록이다. 이 책들은 각각 1992년과 1989년에 출간되었다. 당시로서 친일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던 시절이었던 만큼 백선엽은 아무 거리낌 없이 어쩌면 자랑스럽게 자신의 군 경력을 회고했을 지도 모른다.

1920년생으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을 양성하던 봉천군관학교(중앙육군훈련처) 9기로 졸업(1941년)하고 해방 때까지 간도특설대에서 만주군 중위로 근무했던 백선엽에게 있어서 아마도 가장 치명적인 이력은 바로 간도특설대 근무 경력일 것이다.

간도특설대. 조선과 중국의 항일활동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비밀부대란 설명이 뒤따르고 있다.

간도특설대는 동북지역의 항일유격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인 지휘관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악명 높은 특수부대였다. 이런 행적 때문에 백선엽은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로 선정된 상태이다. 지금도 원로 중국동포 사이에선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치를 떠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실제로 간도특설대원들은 항일부대원을 잡으면 순순히 사살하지 않고 가장 잔혹한 수단을 동원했다. 간도특설대원들의 잔혹한 행위는 항일부대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와 더불어 일본인 상관 앞에서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에게 조선인 포로들은 더 없이 좋은 사냥감이었던 것이다.

연변 작가 류연산씨가 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다’에 언급된 특설부대원들의 만행을 일부 인용한다.

- 1939년 5월 야간 토벌 작전 중 산나물을 뜯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불태워 죽였다.
- 1939년 7월 자신들의 충혼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전사한 항일부대원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 1941년 겨울 포로로 잡힌 항일부대원의 머리를 군도로 자르고 잘린 머리채를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 1941년 1월 포로로 잡힌 여성 항일부대원 4명을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했다.
- 1944년 4월 팔로군을 숨겨준 마을 원로를 죽인 후 그의 머리를 잘라 솥에 삶은 후 두개골을 장식품을 만들었다.

일본판 위키백과(Wikipedia)에 올라있는 백선엽의 경력. 한국판 위키백과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다.
1937년 11월 만주국 간도성장에 임명된 이범익(1883-?, 일제하에서 충남도지사, 중추원참의,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등 역임)은 일본의 환심을 사려고 자발적으로 조선총독부에 간도특설대 설립을 제안해 이듬해인 1938년 12월 15일 1기 입대식을 열린다. 설립당시 명칭은 조선인특설부대였고 후에 간도특설부대로 바뀌었다.

특설대는 해방되는 순간까지 모두 108번, 한 달에 한 번꼴로 항일부대와 전투를 싸워 170명의 항일부대원을 사살하고 139명을 체포했다. 이러한 전과로 조선인 특설부대원 167명이 훈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이 즐겨 불렀을 ‘특설부대가’를 보면 그들의 당시 내면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 /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 건군은 짧아도 / 전투에서 용맹 떨쳐 / 대화혼은 우리를 고무한다 /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는 해방 후인 1945년 8월 29일까지도 팔로군과의 전투를 계속벌이다가 뒤늦게야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듣고 투항한다. 백선엽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후 소련군을 따라온 한인 통역에게서 “조선은 곧 독립된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붙잡혀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빨리 고향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9월 말 고향인 평양에 숨어 있다가 12월 말 38선을 넘어 월남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간도특설대원 백선엽에게 38선 이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백선엽을 비롯해 특설대원 대부분은 한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일본군 경력을 인정받아 단번에 군의 요직을 차지했으며 후에 5ㆍ16쿠데타의 주역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들 꼽자면 정일권(국무총리), 김일환(내부장관), 이한림(육사교장, 건설부장관), 원용덕(헌병사령관), 이주일(감사원장), 김석범(해병대사령관) 등이다.

이들 중에서 박정희와 정일권을 제외하면 백선엽의 승승장구가 가장 눈에 띈다. 어쩌면 부하의 손에 비명횡사한 박정희나 정인숙 스캔들로 불명예를 안은 정일권에 비하면 백선엽은 조용한 가운데 실리와 명예를 동시에 챙겼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백선엽은 ‘6ㆍ25전쟁의 영웅’으로 불리며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으로 전역한 뒤 대만,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대사, 교통부장관, 한국종합화학(현 한화) 사장 등을 지내는가 하면 친동생인 백인엽과 함께 인천대학을 설립하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관운을 과시한다.

간도특설대를 설명하고 있는 일본판 위키백과. 주요인물 란에 백선엽과 더불어 박정희의 이름이 또렷하다. 물론, 한국판 위키백과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다.

그러나 자신과 자기 동생의 이름에서 한자씩을 따서 이름 붙인 학교법인 선인학원은 1994년 3월 인천시가 인천대학의 운영자로 변경되기 전까지 대표적인 사학 비리의 온상으로 지탄받아 왔다. 현재 시립 인천대 누리집 그 어디에도 백선엽, 인엽 형제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군벌 안에서 백선엽이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이어서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위원장’ ‘전쟁기념사업후원회장’ ‘성우회 회장’ ‘대한민국육군협회장’ 등을 맡고 있다. 백선엽이 거쳐 간 여러 직함 중에는 1999년 11월부터 2001년 1월까지 정부의 ‘노근리 사건 대책단 자문위원장’도 있다. 6·25전쟁 당시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서 전국적으로 수없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책임자 중 한명이라 할 수 있는 그자를 노근리 사건 대책단 자문위원장에 앉힌 것이다.

당시 연구소는 그의 자문위원장 임명을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금 그는 더욱 바빠진 모습이다. 건국60주년기념사업회 고문에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등. 그를 내세워 ‘잃어버린 10년’을 찾겠다는 것일까. 백선엽, 그가 바빠질수록 우리는 불안하다. 그가 미워서가 아니라 그가 풍미했던 시절이 반대로 우리 역사에는 피비린내 나는 시련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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