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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의 길을 따른 사람들
곽태영과 권중희의 경우
방학진 2009/01/22 01:25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를 역임한 곽태영 선생이 지병인 당뇨가 악화돼 12월 1일 73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바로 1년 전 11월 16일에는 권중희 선생이 심장마비로 72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두 분 모두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묻혔다. 공교롭게도 두 분은 똑같은 1936년생으로 평생 백범 암살범인 안두희를 추적하며 암살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이 분들의 노력으로 미흡하나마 1995년 12월 19일 국회 법사위 내에 구성된 <백범 김구선생 암살진상규명조사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결론을 내렸다.

“백범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 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고, 안두희는 그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암살자에 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범죄자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정권적 범죄라는 차원에서 우선 도덕적 책임이 있고 또한 사건 뒤처리에서 개입한 것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조사보고서는 또 “이제 백범 암살사건의 전반적 윤곽은 잡혔다”고 진단하였다. (출처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누리집)

△ 곽태영 선생
△ 권중희 선생

곽, 권 두 분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전술적 차이로 갈등하면서도 백방으로 백범 선생 암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등 당시 최고 실력자들의 개입 정황이 높은 상황에서 노태우 독재정권이 암살의 진상을 규명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김구 선생의 초상을 넣기로 한 10만원권 화폐가 뉴라이트 등의 반대로 갑자기 발행 중단된 정황을 전하는 보도를 접하니 저승에 계신 백범 선생에 대한 수난은 언제쯤 끝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호에서는 백범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따르던 곽태영 권중희 두 분을 추모하는 뜻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분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기로 하자.

나치의 선전장으로 전락한 베를린올림픽이 열린 1936년 2월 20일, 곽태영은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권중희는 이보다 열흘 앞선 2월 10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곽태영은 어려서부터 집안 어르신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고초를 당한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며 성장했다. 그 후 독립운동의 대부인 김구 선생에 대해 공부하면서 점점 그 분을 존경하게 되었고 19세에는 백범 선생의 묘소에서 기필코 선생의 암살 배후를 밝혀내겠다고 다짐한다. 권중희는 13세 때 <백범일지>를 읽고 민족정기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1956년 서울에 올라온 권중희는 안두희 응징과 암살 진상 규명을 위해 정부에 지속적으로 탄원을 하는 등 노력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60년 청년 곽태영은 4월혁명에 적극 참가하고 이듬해인 1961년 국학대학(국학대학은 후에 우석대학에 통합되었고 우석대학은 다시 고려대학에 흡수되었다.)의 <민족통일학생연맹> 의장을 맡아 통일운동에도 본격 가담한다. <민족통일학생연맹>은 4월혁명 이후 전국 주요 대학이 거의 가담했으며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하면서 그 유명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4월혁명 1년 만에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민주화와 통일운동세력은 철퇴를 맞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청년 곽태영은 자신이 백범 묘소에게 약속한대로 암살범 안두희를 잡아 배후를 밝히고 그를 응징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그러던 중 1965년 안두희가 강원도 양구에서 규모가 제법 큰 군납 두부공장을 운영하며 호의호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공장 인근에 하숙생으로 가장하여 안두희의 동태를 살피며 기회를 노린다. 그러던 어느 날 안두희가 혼자 공장 마당에서 아침 일찍 세수하는 모습을 포착한다. 이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인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안두희의 자백을 받기 위한 연필과 노트 그리고 비수를 숨기고 접근하여 안두희에게 몇 마디를 거는 척 하면서 비수를 그의 목에 들이대면서 암살의 진상을 순순히 댈 것으로 재촉하였다. 그러나 곽태영은 장교 출신의 기골이 장대한 안두희에게 역습을 당해 죽음을 넘나드는 결투를 벌이는 사이 소란한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공장 직원들에게 도리어 몰매를 맞고 만다. 물론 안두희 역시 청년 곽태영에게 초죽음이 될 정도로 공격을 당한 후였다. 곽태영은 공장 직원들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하는 와중에도 “너희들이 두들겨 패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김구 선생 암살범인 너희 사장이다”라고 말했고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직원들은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곽태영은 살인 미수로 기소되었으나 오히려 국민들은 그의 석방을 위한 청원운동을 펼쳐주었다. 곽태영의 첫 응징으로 안두희는 더 이상 군사독재정권의 비호도 받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자기신분을 감추며 도피행각을 벌이게 되었고, 4월혁명 이후 자취를 감췄던 백범 암살 진상규명에 대한 사회적 공론이 다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1년 안두희가 백범 살해를 부인하는 내용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미국으로 도피하려고 여권을 발급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권중희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안두희 추적을 시작한다. 권중희는 1987년 3월 서울 신촌에서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숨어 지내던 그를 찾아내, 몽둥이로 때려 모두 두 차례 옥고를 치르고 결국 1991부터 1992년 사이 안두희로부터 네 차례에 걸쳐 암살 배후에 대한 자백을 받아내, 이를 바탕으로 1993년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책을 펴낸다. 박기서는 바로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1996년 10월 끝내 안두희를 응징한 것이다.

권중희가 ‘활약’하던 시기 곽태영은 문익환 목사가 이끄는 민주화운동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둘이 상의한 것인 아니지만 절묘한 역할분담이 이뤄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백범 암살 진상규명에 목말라 있던 권중희는 2004년 초 네티즌들이 보내준 성금으로 직접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재미동포와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관련 문서를 찾기 시작했으나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 후 타계 때까지 민족정기구현회 회장,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와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고문 등으로 활동해왔다.

곽태영 권중희 두 분은 단순히 백범을 흠모하는 차원을 넘어 백범을 비롯한 숱한 독립운동가들의 처참한 삶의 근본 원인에 대해 고민하면서 분단 조국의 현실과 정면으로 맞섰다. 따라서 그들이 이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나아가 주한미군 문제에까지 천착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2002년 4월 19일 박정희기념관을 반대하면서 서울 상암동의 기념관 건립 예정부지 앞에서 살점이 너덜너덜해 지도록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내 혈서를 쓰던 곽태영 선생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어느 분의 말처럼 우리 시대의 ‘정의파’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정말 그런 분들이 필요한 이 시대에 말이다. 끝으로 곽태영 권중희 두 분을 잘 아는 박도 선생의 추모 글을 소개하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런 현실을 두고 떠나는 선생의 마음이야 오죽이나 답답하고 괴롭겠습니까? 앞으로 누군가 선생의 기백을 이어받은 의로운 인물이 나타나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기를 기대합니다.”


< 필자인 방학진님은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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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내 심정이요 오거리 2009-02-02 /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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