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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거리의 비사'
곤재 정개청 선생의 자산서원 가는 길
청명수 2013/06/24 07:18    

‘제자 거리’의 비사

2년 전 정부는 전국 주소 체계를 ‘번지수’가 아닌 ‘도로명’으로 바꾸었다. 당분간 우리 집은 옛날 주소인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332번지’와 ‘함평군 곤재로 642’를 병행 사용하고 있다. 주소가 ‘곤재로’가 된 것은 집 앞을 지나가는 도로 끝에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선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자산서원(紫山書院)'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어른들은 ‘신작로'라 불리던 집 앞 도로를 '제작거리'라 불렀다. 면 소재지에서 고개를 넘어오면 첫 집이 주막이었고 그다음 바로 앞집인 우리 집 역시 잠깐이나마 주막이었다. 우리 집에서 자산서원이 있는 무안 천 근처 하인다리까지는 약 500여 미터가 채 안 될 것이다. 그 거리에 주막이 6개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안 천을 끼고 산을 돌아들어 가면 당시 도로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제동(濟洞)'이라는 마을이 산아래 움푹 패인 골짜기 안에 자리잡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곤재 선생의 후손들이 사는 그 마을에 자산서원은 없었고 다 허물어져 가는 제각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10대 후반까지 그 도로를 주막이 밀집해 있는 ’저잣거리‘로 알고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함평군에서는 예산을 들여 그 도로 끝에 자산서원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찔끔찔끔 지원되는 예산 때문에 수년에 걸쳐 공사를 진행하는데 나는 무슨 건축물인가 하고 관심을 두게 되었다. 사실 곤재 정개청 선생의 함자는 30대 때에 읽은 토정 이지함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정비석 작가의 ‘토정비결‘이라는 소설책에서 접한 적이 있었다. 그 책을 보면 전국을 주유하던 토정 선생이 곤재 선생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은 곤재 선생을 수많은 제자가 따르는 기개 높은 선비로 묘사하고 있다. 토정 선생은 화순 운주사로 가기 전에 호남에서 명망이 자자한 곤재 선생을 아니 만날 수가 없었다. 몸소 찾아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담소를 나눈 걸로 기억하고 있다. 자산서원이 준공되면서 나는 곤재 선생에 대한 역사적 사건을 추적하고 공부하게 되었다. 세세한 사항은 생략하고 여기서는 큰 흐름만 간단하게 기술하겠다.

임진왜란이 시작되기 3년 전인 1589년 조선 선조 때에 정여립 모반 사건이란 기축옥사가 있었다. 역사가들은 조선의 당쟁 사에서 이 사건을 조선 당파 싸움의 시초로 기록하고 있다. 동인으로 분류되었던 곤재 정개청 선생은 서인으로 당시 집권세력의 거두였던 송강 정철의 미움을 받아 역모 사건에 엮이게 된다. 동인이 집권할 당시 담양의 향촌에서 후배 선비들과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정철의 행실에 대해 비판적 글인 절의론(節義論)을 쓴 것이 정철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이다. 송강 정철은 정여립이 가지고 있던 곤재 선생의 편지 한 통과 정여립의 집터를 봐 준 것을 빌미로 곤재 선생이 쓴 절의론에 배(排)자를 붙여 배절의(排節義)을 썼다고 정여립과 내통한 역모자로 몰아갔다. 결국, 곤재 선생은 갖은 형장을 당하고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로 간 지 얼마 안 되어 고문으로 말미암은 상처가 악화하였고 그곳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다. 그의 나이 향년 62세였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재구성한 책 『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을 쓴 신정일 교수는 기축옥사가 ‘조선의 천재 1,000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쓰고 있다. 글줄이나 알고 지식 있는 호남 선비들의 씨가 말랐다고 한다. 그 사건으로 자식을 가진 호남의 부모들은 자식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꺼렸다고 하니 그 참화가 얼마인지 짐작으로만 알 뿐이다. 한 때 과거의 정권에서 호남을 비하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의 정권에서도 호남의 인재를 등용하는 데 인색하기만 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축옥사의 참화는 오늘날까지도 그 여파가 지속되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후 조선의 당파 싸움은 조선시대 내내 지속하였고 집권 세력의 부침에 따라 자산서원은 5번이나 훼철되고 복설되기를 반복한다. 마지막으로 훼철되었던 때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었다. 100여 년이 지난 1980년대에 와서야 6번째 복설이 되었다. 바로 곁에 두고서도 이제야 자산서원의 역사적 의미를 깨우쳤다는 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400여년 전 곤재 선생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제자가 이 길을 들락거렸을 것이다. 그 제자들이 자그마치 400여 명이라고 하니 당시로선 실로 많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는 동안 근처 주막에서 문우들과 잦은 술자리를 했을 것이다. 사실 나의 초등시절 지금의 자산서원 자리에 곤재선생의 후손이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 오두막 집인 그 집에 나도 한문을 배우러 몇 번 간 적이 있다. 곤재선생의 제자들을 상대로 주막을 열었던 제자거리가 나의 어린 시절 까지도 유지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당시의 주막을 생각하며 제자 거리를 거닐어 본다. 자산서원 대청마루에 앉아 제자들의 흥겨움에 떠들썩거리는 제자 거리를 바라본다. 많은 제자를 둔 죄로 모함을 당한 곤재 선생의 한 맺힌 숨소리가 들리는 듯 눈시울이 붉어져 온다.


독자 의견 목록
1 . 잘봤습니다 정수아 2017-11-17 /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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