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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下 진도인물열전-2] 진도의 독립운동가 정경옥씨
1930년대, '신학의 향토화'를 주창한 선각자
박남인 2011/03/25 09:31    

  민족독립운동에 앞장선 정경옥씨

  ※일제강점기의 진도 독립운동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번호에는 진도에서 태어나 뛰어난 신학자이기 전에 독립운동정신이 투철해 일찍 옥고를 치르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정경옥선생(감리교 목사)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미진한 부분들은 가족 친지나 향토사학자들의 자료제공 및 조언을 기다린다.


  정경옥씨는 1903년 5월 24일 전라남도 진도읍 철마산 아래 교동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진도소학교(현 진도초등학교)를 마치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서 공부했다.

  평소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져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귀향, 진도읍의 한원교씨 글방(성내리)에서 보향단(補鄕團)을 조직(12월 10일경. 박종협 박석현, 김인수 등 참여)하여 태극기와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선전문을 작성(독립신문 제작)했다.

  동년 12월 30일 진도읍내에 배포하고 1920년 1월 1일 독립만세를 고창하고자 시위를 계획하던 중 발각되었다.(제적당함) 이로 인해 6개월을 복역했다. 풀려난 뒤 진도에서 ‘옥중친구들’과 1920년 진도읍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일본 아오야마대학(靑山) 신학부에 입학했다.

보향단 격문 내용

  학생부형(學生父兄) 제위(諸位)
  무릇 학당이라 함은 도덕을 양성하고 문명의 진보 발달을 도모하는 목적이 있음에도 지금의 보통학교는 일본어를 주로 하여 장래 저들의 사용인을 양성하고자 하니 이천만 동포의 문명진보에 방해되는 바가 실로 가증스럴 뿐이다.
  세월을 허송하여 일본어를 배워 무엇을 하겠는가. 10년 간의 학정 끝에 동포가 고대해온 일대 호기가 왔으니 2만 여의 참사자와 7만 여의 囚獄者를 내고 독립을 이루게 되었는데 일본어는 배워 어디에 쓸 것인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소년시대를 헛되이 하지 말고 가정에서 언문을 읽히고 소학을 배워 효제충신을 닦으며 문명의 서양 신학문을 연구하여 장래 조선에서 상당한 지식과 인격을 갖춘 청년이 될 것을 바라노라. 大韓元年 1月 日

  지금 읽어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독립과 애국의 열정, 시대의 흐름을 간파한 분명한 논리, 간절한 호소력이 빛나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천년을 뛰어넘어 최고운의 ‘토황소격문’ 정신의 재발현이라고 감히 밝히고 싶다.


  아버지는 “13대 독자”, 14세에 결혼

정경옥 목사
  정경옥은 경성고등보통학교 1학년(14세)때 허순화씨와 결혼했다.(자제 정의현, 정휘성) 정 목사 아버지가 13대독자로 일찍 결혼을 시킨 듯하다. 미국 유학중 허순화씨는 별세하였다.

  1931년 감리신학교(협성신학교)에 부임, 내리교회 김현호 목사의 딸 김신애씨와 결혼했다. 두 분 사이에 정우현(현재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정재현, 정혜숙씨가 있다.

  정경옥 선생은 기독교청년회(YMCA)학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김재준 목사,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등과 교우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귀국했다. (선한용,「鐵馬 정경옥 교수의 생애에 대한 재조명」8쪽)

  장로교 선교 지역인 진도에서 정경옥이 감리교 신학교에 진학한 이유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가츠라 암살음모 사건’으로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전도활동을 한 손정도목 사(1882~1931.상해 임시의정원 의장 역임) 이야기를 부모나 주위 분들에게 전해 듣고 감리교신학교로 입학했을 가능성을 연구자들은 주장한다. 손정도는 중국 길림에서 교우였던 김형직의 아들 김일성과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된다.(김일성은 그의 저서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를 ‘국부’ ‘생명의 은인’으로 표현했다). 정경옥은 신학교 졸업 후 「기독신보」에 ‘사랑’이란 주제로 8번에 걸쳐 글을 연재, 교계의 주목을 받았다.

정경옥씨 감리교 신학에 영향을 준 손정도. 왼쪽은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여 “백광수 다음에 정박사를 찾았다”고 수석 임순재씨가 증언했다고 故 박병술(의신몀 침계리. 진도향토사학자이자 교육자) 선생은 ‘진도역사의 빛과 그림자’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사망을 몰랐던 부분으로 해석된다. 설령 만났더라도 사상과 관점이 달라 함께 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본다. 단재 신채호는 상해에서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까지 팔아먹었다"고 강렬하게 지탄했다)

  1927년 9월 졸업하고 미국 개럿 신학교에 입학해서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F. H. 롤의 지도를 받아 그리스도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에 관심을 가졌다.

  1929년 9월 노스웨스턴대학원에 입학,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업성적은 아주 우수했으며 박사과정을 계속하려 했으나 모교의 요청으로 귀국하게 된다. 귀국 중 어떤 마음의 소리가 들려 배 안에서 ‘공부했던 노트 열상자를 바다에 버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과거의 텍스트에 의존하지 않고 늘 새롭게 연구하고 해박한 지식과 학문에 대한 진지한 성찰, 깊이와 넓이를 겸한 열정적 강의로 인해 순식간에 인기있는 ‘명교수’가되었다고 한다.

  1931~37년 감리교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재직기간 중 60여 편의 신학논문을 발표했는데, 1932년 〈위기의 신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해서 한국에 처음으로 K. 바르트의 신학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어 1934년〈기독교의 원리〉를 발표하여 한국 감리교의 교리적 선언을 신학적으로 해설했다. 이러한 교수활동과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건강이 약화되어 1937년 3월부터 1939년 3월까지 고향 진도에서 요양생활을 했다.

  진도의 손재형(소전. 서예가)과는 동갑친구로 서울유학을 함께 하였으며 ‘말이 없다가도 한번 논쟁이 일면 청산유수처럼 막힘이 없어 대적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1939년 4월부터 1년간 만주 사평가신학교(四平街神學校) 교장으로 있었다.
  일인들의 방해로 다시 고향에 내려왔다가 1943년 2월부터 광주교회(지금의 광주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 활동하면서 청년들의 지도에 전념하였다.


  <정경옥 목사, 한국교회에 말을 걸다> “토착영성운동에 전념”


  "몸집을 키워가고 제도와 조직을 공고히 하느라 잊었던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기독교의 토착화 경향을 수용하되 극단적 반서구로 흐르거나 기독교 정체성 자체를 훼손해서는 안된다."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라."

  최근의 개신교계를 걱정하는 목소리처럼 보이지만 1930년대 한국 신학계를 이끌다 1945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친 정경옥(1903-1945)목사가 당시의 교회를 향해 쏟아냈던 고언들이다.

  지난 해에는 정경옥 목사의 생애와 신학을 재조명하는 학술포럼 '정경옥 목사, 오늘의 한국교회에 말을 걸다'가 고인이 소속됐던 수표교 교회의 수표교포럼위원회 주관으로 수표교 교회 예루살렘 성전에서 열리기도 했다.(1933년 수표교교회 목회활동)

  정경옥 목사는 37년 중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진도로 낙향한 이유로는 ‘한창 명강의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명교수가 질투와 모함도 있었지만 “타성과 타협의 생활습관에서 온 ’영적 위기‘가 큰 원인이라고 한다.(이덕주, 「정경옥의 귀거래사」)

  “노동하는 것, 세끼 밥 먹는 것, 밤이면 잠자는 것, 이런 것 밖에는 아무런 원망도 공명심도 없이 운명을 달게 받고 그날그날을 즐기는 단순한 생활이 그 얼마나 거룩한가.
  어제도 종일토록 바닷가에서 조개를 주웠다. 어린이와 같이 단순한 마음으로 노래도 부르고 뛰기도 하였다.
  나는 아무런 비밀도 술책도 비방도 조롱도 가장도 외화도 없는 이 마을의 생활을 숭경(숭경)한다”고 심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37~39년간 귀향시 부친과는 둘째 아들과의 비교로 “미국유학까지 갔다온 아들이 교수직을 그만 두고 진도에 내려와 농민들 거지들과 같이 지내며 시간을 보낸다”고 꾸지람을 받았다 한다. 그는 또 의외로 조상들의 묘를 정리하고 묘비를 세우는 등 이미 ‘신학의 향토화’를 추진했다고 본다.

  서구 신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수용한 신학자면서도 동시에 '토착영성운동'에도 관심을 가졌고, 몸집을 키워가고 제도와 조직을 공고히 하느라 잊고 있었던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메시지를 한국 교회에 줬다는 평을 받는다.
  또 당시 조선적 기독교라는 토착화 경향을 수용하되 극단적 반서구로 흐르는 것도 경계했다. 그는 특히 한국인들이 신명으로 부를 수 있는 멋진 국악예배 음악이 속히 등장하기를 기대했다고 한다.

  정경옥 목사는 당시 교회가 지나치게 '제도화'하고 조직화'됐을 때 생명을 지닌 유기체로서의 속성을 상실해 버릴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교회 안에 '생명'들이 고갈돼 있고 교회 밖의 수많은 생명들이 생명을 위협받고 있으나 교회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회복해야한다”고 외친 선각자였다.


  정경옥의 선비적 영성


  정경옥씨의 글에서 의미 깊은 단어가 있는데 바로 ‘지조’와 ‘혼’이다. 젊은 시절 한학을 공부한 선비적 전통이 배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비정신은 의리와 지조를 중요시 한다. 선비는 감성의 발현인 인정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인 의리를 잘 조화시킨 사람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선비는 청빈을 생활 속에 실천하는 수도자의 모습을 지키는 인격이다.

손정도 목사
  정경옥이 진도로 낙향하여 가끔 만나게 된 이세종(은둔한 ‘성자’로 표현함. 화순 도암면 등광리 천태산 자락 출생)이 바로 선비정신에 아주 어울리는 청빈과 지조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에 앞서 손정도 목사(1912.7~13.11)가 진도에 유배(가츠라 암살음모 사건)와 전도활동을 한 내용을 부모친지로부터 들었을 가능성을 김영명(신학자)씨는 추정하기도 했다.
  (*손목사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했으며 서울 정동교회에서 유관순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고 평양에서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과 교회사목 친구이자 이후 만주에서 김일성의 후원자가 되었다.(김일성 저 ‘세기를 넘어서’중). 또 정목사가 다녔던 협성신학교에서 담임목사를 했다. 큰 아들은 한국 초대 해군참모총장 역임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둘째 아들은 미국에서 의사를 하다 김일성의 초청으로 평야에 가 노년을 함께 하다 평양 열사릉에 안장되어있다)

  정경옥 목사는 복음적 삶(生)의 신학을 구축했으며 그는 주체적 삶을 강조하면서도 이 세상의 객관적 세계와 부합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강조했고 전통적 교리만 반복한 것이 아니라 학문적 방법론 위에서 새롭게 건축했다는 평을 받았다.


  혜성 같은 삶 정경옥 목사


  “그의 공적은 혜성같이 뚜렷했지만 활동기간은 혜성같이 짧았다. 그리고 혜성이 사라진 후 기억하는 이가 적듯이 오늘날 신학자 정경옥 교수를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원로 신학자 유동식 교수는 저서 ‘한국신학의 광맥’(1982)에서 철마(鐵馬) 정경옥 목사를 이렇게 평했다. 정경옥 목사는 김재준 박형룡 목사와 함께 1930년대 한국을 대표했던 신학자였다. 정 목사는 1945년 4월 4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강단에서, 고향에서, 목회 현장에서 뜨거운 영성을 소유한 신학자로 살았다. 한국 최초의 학문적 조직신학서로 평가되는 ‘기독교 신학 개론’(1939) 등 저서와 60여편의 논문을 남겼다.

  진도에서 일제에 의해 강압, 사전 체포 구금되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 이설이 있다. 진도에선 수석(水石) 임순재(임태영의 부)씨의 도움과 활약이 전해지지만 정목사의 가족과 그 후의 신학자(김영명. 호서대 강사)들의 연구에 따르면 좀 다른 부분이 있다.

  “정경옥씨는 1933년부터 수표교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937년 제6회 중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때 동문회 활동을 활발히 하였으며 감리교신학교에서 열린 제4회 감리교신학교 동창회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어 감리교신학교에서 교수를 한 지 5년만인 1937년 3월, 교수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진도로 내려갔다.

  정경옥은 1937년 3월부터 1939년 3월까지 고향인 진도에서 고향의 ‘흙’을 밟으며 단순한 생활 속의 자신을 반성하고 예수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재발견한 예수의 생애를 그린『그는 이렇게 살았다』(1938)와 한국 최초의 조직신학 개론서인『기독교신학개론』(1939)을 집필하였다.

  1939년 봄부터 다시 서울로 올라와 감리교신학교 교수직을 맡아 학생들에게 신학 지식이 아닌 신앙 진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하는 ‘신학’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1940년 봄 감리교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되어서 만주 사평가에 있던 만주신학교 교장을 맡게 되었다. 정경옥이 교장으로 부임한지 일 년이 채 안 되어 학교가 폐쇄되어 고향 진도로 다시 내려 왔다.

  1941년 12월 7일(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전날 밤, 만주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온 식구가 자고 있는데 일본 경찰들이 방으로 들어와 정경옥을 미국의 스파이라고 말하면서 연행해 갔다.
  그를 미국의 스파이라고 해서 구금한 배후에는 진도에서 어떤 사람이 정경옥의 부친과 무슨 일로 분규가 있었는데 앙심을 품고 정경옥을 미국의 스파이라고 경찰에 투서를 했다는 것이다.(선한용, “철마 정경옥 교수의 생애에 대한 재조명”) 그러나 진도 경찰서는 정경옥을 더 이상 구류할 이유가 없어 73일 만에 그를 석방했다.(8개월이 아님) 그는 석방된 후 계속 진도에 머물고 있었다.(‘스파이’로 모함한 이기행이 나중에 체포되어 한 감방에 있게 되어 정목사 부인이 가져온 사식을 그에게 주어 감복하게 만들었다)

  일제 말엽에 정경옥이 광주에 와서 목회를 하게 된 것은 “일본적 기독교단을 형성하라는 (진도 경찰서의) 명령을 받고 출감하여 광주에 자리잡았다”는 것은 사실과 좀 다르다고 선한용은 밝혔다.
  정경옥이 두 번째 진도경찰서에 구류된 기간은 73일간이지 8개월이 아니며, 구류된 이유도 위에서 말한 것이었지 사상관계는 아니었다. 또한 진도서의 감방은 “일본적 기독교의 신학적 과제”라는 논문을 쓸 수 있는 환경도 되지 못하였고 또한 그런 일도 없었다고 가족들은 증언한다.

  진도에서 요양하던 중, 1943년 2월 광주중앙교회 장로들로부터 “청년과 학생들을 지도해 달라”는 두 번의 요청을 받고 나가 2년여 목회하였다. 광주중앙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이미 ‘친일교단’으로 변질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지시를 받아들여 ‘전남교구장’을 맡는 등 외견상 ‘협력’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나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교회 청년 10여 명을 모아 신학을 가르쳤다.

  정경옥은 이 동안 태극기를 다락에 감춰두고 있다가 가끔 꺼내어 어린 아들과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의 사택을 찾은 이에게 태극기를 꺼내 보여주면서 “조금만 기다려라. 조선은 곧 독립한다”고 말해 주었다.
  1944년 12월 16일 맹장염에 걸렸었는데 정경옥과 친한 의사가 식중독으로 오진하여 비눗물관장만 했었다. 그사이에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되었다. 다투어 수혈(총 3,500그람)을 하는 등 제자들의 정성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42세로 1945년 4월 1일 부활주일에, 해방을 4개월 앞두고 별세하였다. 마지막 투병 중, 그를 찾아온 교인이나 청년들에게 유언처럼 한 말이 있다.
  “곧 날이 밝는다.”(김천배)
  “지금 전황이 어떤가?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 몸조심 하게.”
  “복잡에서 단순으로, 복잡에서 단순으로, 복잡에서 단순으로…”(김학준)
  이렇듯 정경옥은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들을 제자들에게 남기었다.
  그의 후손 중에 해방이후 진도의 국악과 문화예술분야에서 크게 활동한 정의현(호 송일. 1921-1999)씨가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배제학당에서 서양음악을 공부, 56년 진도 최초의 국악원을 설립 이후 국악교재를 만드는 등 국악이론을 정리했다.
  *정의현씨는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으며 큰아들 정상원씨는 서울에 거주하며 정영완 정옥자씨가 진도에 살고 있다.

  “신앙의 매춘부가 되지 말자. 마귀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준다는 시험이 가끔 온다. 지조있는 믿음을 가져라.”
  “인생을 대관하라. 넓고 큰 마음을 소유하자. 영원한 값이 있는 일을 찾아보자.”
  “중심이 없이 분산된 인격은 생의 능률을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거나 무엇을 생각하거나 중심이 흔들리면 안 된다”
  정경옥은 신학의 사명을 ‘시대화’와 ‘향토화’로 제시하였다.
  오늘의 우리 삶의 과제가 이미 70년 전에 한국의, 그것도 진도에서 태어난 한 선각자의 주창에서 비롯되었다니 감격과 한탄이 함께 나온다.

  3.1운동 과 독립운동을 한 진도인들은 진도군지 등에 “박봉석(28년 박종협과 일본 밀항)은 오사카에서 조선인 20명과 함께 선두 연명발기로 조선적화당 비밀결사를 주도했다” 하였으며 검거 2년 1개월 26일째 오사카형무소에서 사망. 2001년 독립유공자로 추서.
  박두재-진도읍 북상리 출신. 곽재술, 곽재필 조규선 박종금에게 사회운동을 지도함. 황해도 해주출신 여성항일운동가 주용해와 결혼.
  박동인-동외리 출생. 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시 광주농업 22명 시위주동자 중 한명. 33년 1월 결성된 진도 최초 비밀결사 ‘자각회’ 교육부장 역임.
  이외에 김경석 김상규(석현) 박사배(조도 창리) 박석현 박종금 박종식 박종준 이기환 이병영 이광우 이재실 이일근 조규광 조규선 등 많은 분들이 계셨다.

(박남인.namin4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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