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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인의 진도이야기


활인구세의 법을 담은 민족무예 기천문
2대 문주 박사규씨 진도를 찾다
박남인 2009/07/11 16:56    

활인구세의 법을 담은 민족무예 氣天門
2대 문주 박사규씨 고향 진도 방문, 다물 꿈꾸는 기천의 해상도장을 그리다



    평양이었다. 10월 3일을 맞아 단군릉 앞에서 개천절민족공동행사 문화공연 가운데 이색적인 공연이 펼쳐졌다. 진도군립예술단의 장단에 맞춘 단군수련법 ‘기천문 예무단’의 공연이었다.
    마치 한 마리 학이 고요한 날개짓을 하듯 부드럽게 휘어지는 팔과 다리의 움직임이 기의 흐름을 타고 원무를 그린다. 때로는 한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한 보배섬 진도북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유연한 춤사위 속에서도 역근의 손끝과 발끝에서는 수천 년 우리 민족에게 흘러 전해온 기가 뿜어져 나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소리없는 기백과 경건함을 불러일으킨다.
    단군수련법이라는 기천문은 남북을 아울러 선조들의 기맥을 옛 고구려 수도 평양에서 당당히 선 보였던 것이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법을 써라!”


△ 태양을 누르듯
    기천문의 2대문주인 박사규씨는 “기천(氣天)은 단군 조선 때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한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법”이라고 한다.
    조의선인(皁衣仙人)의 다물(多勿)정신을 이어받은 기천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심신수련법으로 단군 조선에서 고구려, 발해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삼국의 특정 무예단만을 정통으로 고집하지 않는다"고 박문주는 밝혔다.

    그러나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후 기천은 전통 춤, 민속놀이 등에 흔적을 남긴 채 산중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지킴이들에 의해 그 정통의 맥이 깊은 산중에서 비전되어 왔다. 이와 함께 초기에는 백두산(대풍산이라고도 한다) 중심이었던 흐름이 조선 말엽께는 그 뿌리가 태백산맥(영월 미탄 외)으로 옮겨진다.
    일제시대엔 기천인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맥이 거의 끊겼다가 기천문의 선대 문주인 원혜상인과 기천의 마지막 전인인 대양진인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사규문주에 이르러 전국 대학가 동호회와 많은 도장이 생기고 전승 보급되면서 우리 민족의 가장 정통적인 무예로 정착되고 있다.
   여기에는 박문주의 역할과 혼신의 노력, 수련, 지도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2대문주로 추대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모처럼 진도를 찾은 박사규문주를 직접 만나 궁금한 점들을 물을 수 있었다.

    그는 진도에 오랜 지기들을 갖고 있다. 전 전남도의원을 역임한 박영상씨 등은 절친한 죽마고우로 통한다. 젊은 시절부터 의류사업을 하면서 모은 적잖은 돈을 기꺼이 벗들과 지인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백두산 주변에서 연원하고 옛 고구려무인들의 복장에서 기천의 정신과 예법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맞습니다. 현재 기천 복장을 보면 흰옷에 띠를 양쪽에 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띠를 매는지는 몰랐는데 북에서 고구려 시대 무사 석상이 발견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임금을 호위하는 어장군의 복장이 지금 기천 복장하고 똑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문주는 또 단군 할아버지가 기의 달인이고 무예의 고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조선 2천년 왕국, 고구려 1천년 왕국이 가능했던 이유가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던 뛰어난 무예와 군사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입문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 젊은시절의 범사
    “젊은 시절 혈기가 넘쳐 무술 고단자가 있다면 찾아가 무술대련을 요청하곤 했다. 당시 산중에서 나타난 한 기인이 있다기에 직접 찾아가보니 체구가 너무 왜소해 어이가 없었다. 몇 번의 고사 끝에 정작 대련을 하자 순식간에 제압을 당했다. 바로 비연수(飛燕手)라는 기천문의 최고 살수였습니다.”이 비화는 사실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졌다. 기가 충만해오르면 박대양진인은 주변의 전봇대를 달음질하듯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바로 무릎을 꿇고 제자가 되겠다고 요청했다. 그 후 박씨는 3년간 묵언수행을 해야 했다. 역근법을 거쳐 타통법 수련은 그를 수년 동안 대중목욕탕에 갈 수 없도록 온 몸에 멍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상쾌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 기분을 “제대로 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기천의 시작과 끝, 내가신장


    이제 그는 몸을 닦아 도를 얻는 경지를 주창한다. 기천의 행법 중 ‘태산심법’이 권 하나로 태산을 격파하는 자세가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몸이 바로 부처의 집”이라는 확고한 논지를 갖고 있는 박문주는 “선방 스님들도 자주 찾는다”며 좌선수행도 건강이 밑받침이 될 때 깨달음이 오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제사를 모시기 위해 방문한 집에서 직접 내가신장을 시연하며 따라해보라고 했다. 확실히 자세잡기가 힘들다. 아랫배에 기가 가득 차오르는게 제대로 된 자세라고 알려준다.

    박대양진인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5년 만에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고 소회를 피력한 적이 있다고 했다. 오랜 수련 끝에 산에서 내려와 교외별전의 민족무예 “기천”을 전수할 임자를 운명적으로 만났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는 또 5년 전 현재의 계룡산(하계리)으로 들어오게 된 것도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깊은 수련의 한 순간 ‘즉심’에서 “님이 오셨다”는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산중의 계룡도장은 기천 수련자들에겐 최고의 무예와 정신수련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며 제2의 성지가 되고 있다. 제자 중엔 신부와 스님들도 많다고 넌지시 알린다. 에전에 비해 젊은이들이 도전정신이 없어졌다며 대련신청도 드물다고 한다.
    “옳은 종자를 걸러내는 일”에 그는 전념하면서 이른 새벽 연천봉, 문필봉 관음봉을 돌고 태양빛을 마주한 기공수련을 한다.
    박문주는 세속과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가족들도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만날 뿐이다. 먹고사는 일에도 그리 구애를 받지 않는다. 박문주는 기천의 무(舞)의 달인으로도 명성이 크다. 진도출신 인간문화재 명인 박병천씨와 교류하며 서로 공감대를 넓혀가던 중 작년 박씨가 작고한데 아쉬움을 토로한다.

    박문주의 고향은 전남 진도 의신의 한 마을이다. 고인돌 군락과 덕신산에서 발원한 맑은 시냇물을 따라 동백골이 있었다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6월 16일 그는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고향 진도를 찾았다. 삼별초의 호국성지인 이곳 진도는 그에게 이미 역사의 ‘기’를 유년시절부터 축적해왔지 않았을까? 용장산성과 첨찰산 여귀산은 산맥은 강한 해풍에 견디며 봉화연기를 피워올리고 멀리 왜구 등으로 부터 남해를 굳건히 지켜왔던 그 얼이 오늘의 박문주의 영적 기반을 구축했다고 생각해본다. 박문주는 이날 오후 허소치의 운림산방을 둘러보고 사천리 남쪽 산에 있는 선영묘소에 참배하고 밤에는 가족과 함께 제사를 모셨다.
    그는 매우 겸손하며 소탈해보였다. 누구와도 친근하게 어울리는 품성이 돋보였다.

△ 고향바다에 이르다

    나는 처음 만나는 이분에게서 묘한 감흥과 또 다른 숙명의 결정체를 발견한 감격을 맛보았다. 그렇다. 그 또한 오늘 21세기의 또 다른 단군의 현신 역할이 아닌가? 멋들어지게 깊은 산중 풍찬노숙에 길러진 구렛나루는 울두목 건너 해남 녹우당 공재 선생의 자화상을 절로 떠올리게 했다.
    또 한편으론 역근마법 내가신장으로 면벽수행을 했을 달마대상의 초상이 언뜻 투사되기도 한다. 무예를 하듯 일필휘지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참선수행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동중정(動中靜)과 한 법이 만법에 통하는 그 경지를 함께 떠올리면서.


“말과 글을 버릴 때 오히려 도를 깨치는데 유익”


    산중으로 숨어들어갔던 기천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인 1970년. 초대 문주 대양진인은 아주 어렸을 때(6세)부터 원혜상인(162 졸) 아래 깊은 산속에 자라면서 기천의 수련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민족수련법 기천을 민족에게 전파하라는 원혜상인의 말을 따라 산에서 내려와 기천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원혜상인은 한 3년만 더 수련한 뒤 내려가라고 만류했지만 어려서 떠난 어머니를 찾아 하산한다. 삼년 뒤 원혜상인은 세상을 뜬다. 더 가르칠 무엇이 분명 있었을 터인데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누군가 제자 중 서책과 검을 훔쳐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대양진인이 여러 제자를 두었듯 원혜상인도 또 다른 비보 제자를 기르지는 않았을까 별스런 상상력이 막걸리기운에 실린다.

    기천이 단군수련법이라는 것을 밝힌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단군’에 대한 인식 자체가 상당히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양진인이 세상으로 나온 1970년대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로 전통민족사상이나 정신수련법 등은 거의 미신으로 취급받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기천의 유래를 밝히고 온전하게 전하는 것이 어려웠다.

△ 박문주의 단배공-단군배공이다
    기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수련법의 하나인 단배공의 경우 사실은 단군배공의 준말로 단군에게 예를 올리는 자세임에도 이를 밝히지 않았고 단배공의 단 자도 단군 단(檀)이 아니라 붉을 단(丹) 자를 사용했을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기천문 수련도장이 20여 개, 기천을 거쳐간 사람들만 해도 벌써 20~3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대양진인은 어떤 때는 무예로, 어떤 때는 선도로, 활명으로, 춤사위나 호흡법 등으로 가르치는 상대와 장소에 따라 각각 다른 방법으로 기천을 전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기천은 ‘전통무예 기천’ ‘산중무예 기천’ ‘민족선도 기천’ ‘기천 활명’ ‘기천 춤사위’ 등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기천의 가장 기초적인 자세를 배우는데는 6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그리고 고수가 되려면 5년 이상을, 깨달음의 경지까지 가려면 10년은 해야 한다고. 기 치료가 가능한 고수의 단계를 넘어 정신적 깨달음을 얻어 영통하게 되면 세상 돌아감의 이치를 훤히 보고 예측할 수 있다고도 한다. 지도자의 자격을 얻는 정인이 현재 8명, 법인은 11명에 불과할 정도로 엄격한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김영기 기천문 무예단 원장은 어느 인터뷰장에서 이런 말을 했다. “100년 전 일본이 꿈꾸던 대동아공영을 고조선은 4천년 전에 이루었다. 당시 최고의 청동기 문화와 광대한 지역을 2천년 동안 평화롭게 다스렸던 기록들을 보면 고조선은 2천년 후에 등장한 로마 제국과 비슷한 군사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전통을 이어받고자 고구려가 ‘다물’을 국시로 했다고 본다."고 했다.
    올 해는 대한제국 총참모중장 안중근장군이 동양평화를 깨트린 원흉으로 지목한 이토히로부미를 하르빈역에서 저격 응징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민족무예의 정신이 700여년 전 몽골제국에 강력히 대항했던 고려삼별초가 다시 떠오른다. 박사규문주는 그런 역사의 기백으로 민족부흥과 통일보법을 밟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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