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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인의 진도이야기


월강 달강 반성중에 하루아침만 살고지고
옛 가흥골 군내면 월가리를 찾아서
박남인 2008/08/29 14:34    

옛 가흥골 본향 자부심 잃지 않은 군내면 월가리

나그네는 이정표가 있는 길이 반갑기 마련이다. 고갯마루 서낭당이거나 눈을 부릅뜬 장승 벅수거리,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주는 당산나무 그늘은 정겨운 벗처럼 다가온다. 이름도 없는 후미진 두메마을을 지날 때면 사람들이 괜스레 옆 눈질하는 듯해 괴나리봇짐을 단단히 조여 발걸음이 빨라지기 마련이다. 80년대를 지나면서 진도에도 각 마을 앞에 이정표 표지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수백년 전부터 마을 표지석을 세운 동네도 더러 있었다. 용장리 덕병리 고성리 그리고 월가리 등이 그렇다.

군내면 월가마을

군내면 월가리 마을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마을 복지회관이 준공됐다. 지난 7월 26일 진도군 실버예술단의 식전공연에 이어 열린 준공식에는 박연수 진도군수, 최길환 재경월가리향우회장 등 많은 향우들과 주민 등 250여명이 참석해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노인들의 여가선용 및 편안한 휴식처 제공을 위해 세워진 마을 복지회관은 부지 744㎡(건물면적 184.9㎡)에 1층 건물로 마을회관 및 경로당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총 사업비 5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서 2008년 3월 착공, 7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이날 준공식을 가졌다. 박연수 진도군수는 “마을복지회관 준공을 계기로 연로하신 어르신들의 포근한 휴식처가 제공되어 복지 향상에 기여할 수 있어 주민들과 함께 매우 기쁘다”고 했다.
신축 마을 복지회관은 주민들의 여가선용 공간 활용과 복지증진은 물론 주민들의 결속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을은 약 600여 년 전 홍씨와 양씨가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홍씨와 양씨는 한 사람도 없다.
주요 성씨는 김해김씨 원주이씨 박씨 경주최씨 구씨 한씨가 있고, 채씨 강씨 곽씨 금씨 배씨 백씨 윤씨 오씨 안씨 송씨 장씨 정씨 진씨 조씨 허씨 등이 있다. 이는 홀로 사는 부인들의 성씨가 대부분이라 외부 유입과는 관계없는 듯하다.

마을경로당 준공 기념 잔치마당 (서울향우들 방문)

가흥골 정기가 달빛에 흐르면

본래 진도군 군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정자리 일부와 군일면의 동산리 일부, 부내면의 당동리 일부, 고이면의 석현리 일부를 폐합하여 월가리라 해서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정거리는 월가리 10반으로 편입되어 있다가 2005년 진도군 조례 제18125호에 의거하여 월가리에서 독립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임씨가 있으며 쌀이 주 농작물이다.
옛날 진도군수가 부임해 올 때 관재를 넘어 이곳 북산 지방뫼를 지나 오리정 쪽으로 지나갔다고 한다. 2005년 조사에 106세대 223명이었으나 작년 조사에서는 105세대 219명으로 약간 줄었다. 여자가 119명이다. 정자에 모인 촌로들은 “실제 보면 90가호 조금 넘제”한다. 다문화가정은 중국교포가 시집와 자식 낳아 살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 쌀과 구기자(약 30여 가호 작목반 구성)가 있다. 청년회 부인회 그리고 상여계가 있다. 수십 년 전부터 당제 충제 등을 지내지 않고 있다. 유물유적으로 마을 입구에 미륵선돌이 있으며 향교터(읍내방향 마을 입구)와 서당터가 전해온다. 서재지는 정자리 가는 방향에 있었다 하며 “유월제(遊月齊)”라 전한다.
위치상 군내면의 남부에 자리하고 최근 월가리 10반이 분리해 정거리로 불리고 있다. 남쪽은 진도읍, 북쪽은 분토리와 접하고 있다.
진도군은 지난 해 ‘진도군민의 상’ 수상자로 이곳 출신 김흥래 前행정자치부 차관(66세)을 선정 수상했다. 수상자 김 씨는 이곳 월가리 출신으로 중앙부처에서 36년간 공직 활동을 하면서 고향발전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쳐왔다.
특히, 진도군 신청사 건립과 도서개발사업 지원을 비롯 지방도와 군도, 농어촌 도로개설, 재해예방시설 지원, 월드컵 관광 문화유적지 가꾸기 사업 등 진도군의 발전을 물심양면으로 위해 노력했다. 진도군은 지난 해 11월 1일 진도 아리랑 축제 기념식 행사에서 ‘진도 군민의 상’을 수여했다. 잠시 그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자.


직원들에겐 4대보험 외에 오피스텔 하나를 제공해

중국집 사장이 된 김흥래 전 행자부차관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김 전 차관은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3남1녀 중 둘째로 자랐다. 진도중학교 재학 시절 월사금(다달이 내던 수업료)도 대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사정을 알던 중3 담임선생님이 국립 목포해양고에 장학생으로 갈 것을 권했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건국대 축산과에 장학생으로 합격했지만 생활비가 없어 서울 유학은 포기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합격 축하인사를 받던 아버지에게 어렵게 “아버지, 저 안 갑니다”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고는 곧장 뒷산 산지기집으로 들어갔다. 산지기집에서 공부해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서 공직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단국대 법학과에서 공부하면서 고시를 준비했다. 1971년 제10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목포시장, 내무부 감사관, 기획관리실장을 지냈고 내무부 국장 자리도 거쳤다. 광주시 기획관리실장 시절엔 5·18 민주화 보상법과 직할시로 승격된 광주의 틀을 잡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던 때’라고 회고했다.
서울대와 단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를 땄고 퇴임 후에는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도 지냈다.
“약을 먹고도 병을 낫게 하겠다는 의지가 없거나 장 기능이 약해 약의 효험이 없으면 백약이 무효죠. 아무리 좋은 안(案)이 있어도 공직자가 의지와 열정, 전문성이 부족하면 ‘백안(百案)이 무효’예요.”
‘공직자 보약론(補藥論)’을 꺼내던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주전자에 담긴 자스민 차를 연방 따랐다. “특히 지방분권은 ‘설사 시스템’이에요. 몸 생각 않고 많이 먹으면 설사하듯 좋은 정책을 줘도 집행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부 군 단위 공무원 수준은 ‘영 아니올시다’입니다.” 그는 지방자치단체가 공무원이 능력을 키울 기회를 줄인다고 진단했다. 도지사나 시장, 군수 아래서 일하다 ‘한자리’하면 된다는 생각에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지 않는다는 것. 매년 자격시험을 봐서 전문성을 키우고 중앙과의 인사교류를 확대해 상품성을 높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위에서 정책을 입안하면 이를 성실히 수행하기만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도 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훈수도 잊지 않았다. “교수 출신 장관이 많대요. ‘교수장관’은 박식하지만 정책 실행 사이에서 가끔 혼동해요. 입각하면 자신의 전문성에 함몰되지 말고 현실감각을 먼저 익혀야 해요.”
그는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중앙인사위원회를 꼽았다. 위원회 조직을 살리려니 규제만 만들어 공무원들의 ‘옥상옥(屋上屋)’이 됐다는 것. 정치 입문 여부를 타진하자 그의 머리와 손이 동시에 좌우를 오갔다. “김홍일(통합민주당) 의원의 권유로 2002년 목포시장 선거에 뛰어들었는데 경선에서 떨어졌어요. 현실 정치는 다르더라고요. 이젠 중국집 사장으로 살렵니다.”
부인 하씨는 경기 성남시에서 피자가게를 12년째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효불효의 전설새긴 이씨보


역사가 깊은 마을이라 전설이 없을 리 없다. 옛날 월가리에 이씨 가문의 청상과부가 아들 둘을 기르면서 수절하고 살았다. 그러다 이씨 부인은 ‘떡절이’에 사는 서당 훈장과 눈이 맞아 좋아 지내게 되었다. 마음으로야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밤만 되면 잊을 길이 없어, 성장한 두 아들과 같이 든 잠자리를 가만히 빠져나와 십 리가 넘는 덕병길을 향했다.
당시에는 월가리 동북간에 군내천과 월가천이 합류하는 곳에는 보(洑)가 없어서, 떡절이로 왔다갔다 하려면 내를 건너야 해서 자연히 버선발이 젖을 수밖에 없었다. 이씨 부인은 훈장과의 해후가 끝나면 가만히 돌아와 젖은 버선을 말려놓고 아들들과 같이 잔척을 하였다.
이런 일이 거듭되자 사실을 알게 된 두 아들은, 어머니 몰래 군내천과 월가천이 합류하는 곳에 보를 만들고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몰랐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씨 부인은, 죄의식과 두 아들의 효심에 감동하여 삭발한 후 두 아들을 열심히 키워 장가보낸 뒤에 이 보 옆에서 자결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모자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아들들이 만든 보를 ‘이씨보’라고 하고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마을 앞으로는 현재 진도터널과 연결된 국도 18호선이 새로 포장되어 달리고 있다. 공사 당시 많은 기왓장 주춧돌 흔적이 나와 이곳이 가흥현의 치소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 일게 했다. 정자리쪽의 수운과 연결되는 지점으로 해로교통이 용이한 곳이라 볼 수 있다.
갈수록 늘어나는 노인들의 여가선용과 휴식처 제공,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세워진 마을 복지회관은 당장 이번 여름에 동네 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했다. 향우들이 선물한 각종 전자 기기들도 효자노릇을 한다. 바로 앞에는 택배사무소 겸 점방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가운데 정자-노인들이 휴식을 하고 있다


박대형 효자각 전설 아직도 흐르고


진도가 낳은 효자로 박대형이 있다. 월가리 가는 길목이니 한 번 짚고 쉬어 간다. 아버지는 박총룡(朴叢龍, 1494~1532)이고, 어머니는 장흥임씨(長興任氏)이다. 박대형의 12세손으로 박천재(朴薦在)가 있다. 박대형은 (1532-1590) 5세에 자신이 유복자임을 알고 부친의 묘를 찾아 조석으로 통곡했으며, 편모 임씨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했다.
편모가 병을 얻어 엄동설한에 숭어 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하늘에 기도하며 얼음을 깨니 은빛고기가 뛰어나와 병든 어머니를 공양해서 쾌유하게 하였다. 마침 전라감사 조상우가 지방 순시 중 진도에 와서 그 소문을 듣고 중앙정부에 보고하였다.
중앙정부에서는 그 효성을 높이 사서 1571년(선조 4) 진도읍 동외리 자리에 정려(旌閭)를 세워 공을 높이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벼슬 품계를 주었다. 그가 진도군의 향리(鄕吏)를 지낸 것이 1883년에 진도읍내 정거름재에 세워진 비에 적혀 있다.


씨알좋은 알짜 소류지로 유명한 저수지


월가지는 작은 저수지이다. 정그럼재를 넘어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붕어가 소규모가 아닌 준월척에서 월척이 많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정거름재(수레가 멈춰서는 재) 막 넘어 위치한 월가지는 1963년에 축조된 약 4만평 규모의 소규모 계곡형 저수지이다. 주 어종은 붕어 외에 잉어와 메기가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지형적으로 채비를 드리우기가 매우 용이하다.
수심은 제방쪽이 약 3m이고 상류쪽은 1.5~2m정도이다. 주 포인트로는 제방 우측 상류권의 큰나무 주변으로 2.5~3칸대에 외바늘 채비로 바닥새우를 사용하면 대물급 월척더 낚는다고 한다. 또한 제방 좌측 상류지역에서 지렁이를 사용하여 60∼70cm급 잉어를 낚는 꾼들도 있다. 월가지는 물이 맑아 붕어의 힘이 좋아 꾼들의 손맛을 만족시켜 널리 알려졌다.


물때를 잘 만나면 가흥현 노래가 일고


가흥현은 진도군 군내면 분토리 일대에 고려시대까지 있었던 옛 고을 이름이다. 지금도 시골 노인들은 월가리 출신 여자들을 “월강댁”이라고 부른다. 상가리는 상강댁이 된다. 현재 동진농협이 선진농협에 흡수 합병되었지만 설립 당시에 “가흥농협”으로 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본래 백제의 추산현(抽山縣) 또는 원산현(猿山縣)이었다. 남북국 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뇌산군(牢山郡)으로 개칭하고 무주(武州:광주) 관하에 두었다. 이때 영현(領縣)으로 첨탐현(瞻耽縣)을 관할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가흥현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1018년(현종 9)에 진도군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제8회 한림문학상을 수상한 김학래씨는 김흥래씨의 친형이다. 교육자로서 평생 교단을 지키다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저서로 수필집 “아름다운 여운” “산너머 남촌에는” “구름처럼 강물처럼” “고향하늘에 띄운 연서” 외에 열 번째 수필집 “동창이 밝았느냐”를 냈다.

향우 중 김희주(78)씨가 객지에 나가 자수성가해 마을에 많은 희사를 하기도 했다. 향우회장에 최길환(60), 한국화가 윤남웅(윤복술의 차남. 전남대), 영문학박사 김재오(35.전남대), 이승찬 곤충학박사, 김상남씨의 큰아들도 경제기획원에 근무하고 있다. 이당권씨는 행정고시에 합격 문화관광부에서, 이관용은 건축학박사로 이병영은 농업학 박사로 현직활동을 하고 있다.

가흥골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이 발심을 키워낸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장수노인은 이난용 김행권씨로 85세에 이른다. 노인회장은 김창원, 마을이장은 김길성(71)씨가 맡고 있다.


양호동 호환 액맥이 역할하는 미륵선돌


마을입구에 선 미륵선돌
마을지명을 보면 저수지 위 동남쪽에 큰 산이 자리하는데 마치 두 마리의 호랑이가 마을 쪽을 노려본다 하여 “양호동(兩虎洞)”이라 부른다. 월가리 주민들은 이 범들이 월가리를 헤치지 못하게 하는 방편으로 커다란 입석을 현 저수지 안쪽에 세워두었다. 미륵선돌이라고도 부르나 호랑이를 감시하는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해 준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마을 병풍역할을 하는 뒷뫼엔 부엉바구가 있어 예전 부인들이 봄날 음식을 장만해 이곳에 올라 놀았다고 한다. 가흥들 냇가를 건너가는 청석다리가 있었지만 경지정리 때 사라졌다고 한다. 장사 4명이 큰 지게에 져 왔다는 돌들로 분토리로 가는 유일한 다리였다. 월가리는 동네 어느 곳을 파도 기왓장이 무수히 나왔다고 한다. 해서 진도군수가 관재를 넘어오면 이곳이 군 치소인줄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정자리 방향에는 북풍받이 바다를 가리는 조산이 있었으나 이도 그 흔적이 사라지고 이씨보 돌들은 마을 안길 다리로 썼으나 지금은 이도 사라졌다고 한다. 주민들의 종교성향은 기본적으로 유교적이나 오래 전 천주교 공소가 들어섰으며 지금은 군내면 신동공소를 이용하고 있다. 또 예장초대교회(분토리)를 다니는 신도들도 있다. 인근에 불장사가 자리하고 있다.
군내초등학교 12회를 나온 이양진(78)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 때 어린이였제만 일본이 망한다고 밤새 뛰어다니며 놀았던 기억이 선선하다”고 했다. 당시에는 신흥초등학교가 군내초등교의 간립학교였다고 했다. 월가리 마을 앞 들 건너 산에는 지금 한창 태양열발전소가 건설되고 있다. 진도도 작년부터 대체에너지 시설과 생산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개발붐이 일고 있다. 울두목에는 그 “동양 최대”라는 묘한 크기 비교의 조류발전소가 또 건설되고 있다.

월가리 앞으로 길이 나면서 월가리는 더 가까이 읍을 향한다. 정거름재도 쉬어가라며 소매들 붙들며 선선한 바람을 건네주기보다 월강 저수지 월척 손맛만 담아 가라며 등을 떠민다. 순박한 사람들은 옛 시절 분토리의 군내초등학교 다니던 길도 주름살 속에 접어 담았다. 아제 아이들은 읍내로 학군이 바뀌었다. 중고등학생들도 다 읍내로 다닌다. 북산을 휘감은 임도와는 아직 연결되지 않았다. 정자리와 분산마을 가운데로 흐르던 바다는 이제 소금기도 다 지웠다.
동네 안에 아이들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 수십 년 전 이 마을 뒷뫼에서 녹차를 딴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그 쯤 높이에 치소가 자리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작은 당 큰당도 다 없어졌다. 종교가 서양화하면서 풍습도 그만큼 빨리 사라진 듯하다.
옛날 이규보가 동국여지승람 진도군조에 시를 써 놓았다. 풍습을 노래했지만 보는 관점이 조금 다른 듯하다.


민시어렴 불심역농(民恃魚鹽 不甚力農)

“백성들은 고기잡이 소금 굽기에만 의지하고 농사에는 힘쓰지 않는다.” 라고 했다. 농토가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로 보인다. 진도는 내륙 깊숙이까지 수운이 연결되어 주거지 바로 앞에서 어패류를 잡고 해초를 뜯어 먹을 수 있는 천혜의 지형을 갖춘 곳이었다. 제주나 오끼나와 등 남쪽 해상 섬사람들이 먹을 것이 떨어지면 물물교환을 위해 혹은 약탈까지 감행하며 진도를 드나들었다. 남도포석성 금갑진성 조도 맹성관방과 수많은 봉수대가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 간척지가 개간되면서는 상황이 분명 달라졌으리라. 근대의 진도는 일 년 농사에 5년을 먹는다고 했다.
소금은 말 그대로 금값을 한다. 지구 어디에서도 소금은 인간에게 가장 필수적인 섭취물 아닌가? 생선이 많은 것도 탓할 일이 결코 아니다.
진도에서 노래와 민속이 발달한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겠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석형은
地僻民淳俗易治(지벽민순속이치)
“땅은 비록 외지나 이곳 백성은 성정이 순박하여 풍속은 다스리기 쉽다”고 적었다. 고려사를 편찬한 문신으로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고 한다. 국영목장으로 활용되던 진도는 물산이 풍부해 관의 수탈이 심하지 않으면 가히 살만한 곳이었으리라. 세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재 설군이 되어 영암과 해남 등지를 전전하던 진도사람들은 다시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오히려 고향을 떠나야 입신과 공명을 세우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당시에는 타향살이의 서러움이 무척이나 컸던 모양이다. 나주와 영암의 경계인 시종면 대여섯 마을은 인근 마을 주민들로부터 “섬놈들”이라고 꽤나 배척을 받았다고 수년 전 그곳 촌로가 증언해 주었다. 진도사람들은 수난은 컸지만 그럴수록 에급을 떠나 가나안땅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민족처럼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있으리라 간절히 기다려왔던 것이다.


가흥현 제영
십리평교일대천
아래임조의망연
철마산전운사루
압구정하수여연
이대정언유유묘
당시향교폐위전
고금홍체개여차
회수고성낙조변


-곽진권 1863년생이다. 1942년에 졸. 군내면 송산리 출신. 자는 필성. 호는 송암. 현풍인. 당대에 진도문장가로 읍내에는 박강재 동촌에는 곽송암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참고문헌-한국지명총람. 진도전자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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