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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인의 진도이야기


왜구들의 침탈을 막던 진살등 돌장승
생기복덕 있는 제관 왼새끼 금줄 앞에 영기 세우던 덕병 장승제
박남인 2008/02/15 11:30    

진살등 돌장승의 정기 가득한 마을 - 군내면 덕병리(德柄里)

   덕병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골산 남서자락의 용인리와 달마산 건너편의 한의리를 합쳐서 덕병리로 병합했다.
   금골산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현재 진도터널 앞에서 오른쪽으로 연산마을을 지나면 곧바로 덕병마을이 나온다. 속명은 흔히 ‘떡저리’라고 부른다.

   옛날 이 마을에 거주하던 도사가 명절 때 부녀자들의 ‘떡동구리’를 모아들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촌로들에 의하면 1400년경 처음 마씨가 시거했고, 그 후 밀양 손씨들의 증손들이 들어와서 퍼졌으며, 경주 최씨, 신안 주씨 제주 양씨도 입도했다고 한다. 현재 덕병리(2008년)에는 101가구에서 216명이 거주하고 있다. 밀양손씨가 11가구로 가장 많다.

    마을 아래 한눈에 크게 들어오는 너른 간척들, 특히 배나뭇들이라고 부르는 들을 북서쪽으로 마주하면서 해발고도 겨우 5~10m의 고두산(高頭山)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배산이 되는 고두산은 해발 252m이다. 고두산 정상에서 약간 서북쪽으로 가면서 한의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솔개재를 지나서 서북쪽으로 더 내려가면 해발 134m의 달마산에 이른다.

   완만한 고두산 서북사면을 이용하여 파,고추 등 다양한 계단식 밭들을 일구었다. 골짜기 물 한 방울도 아까워 ㄱ자 모양의 저수지를 만들었다. 지금은 배나뭇들을 포함하여 주변 간척지들이 전부 기계화를 위한 대규모 농지정리가 격자형으로 잘 다듬어진 데다 건배산 앞자락에서 진도읍 망치산 앞자락인 파군도까지 연결한 약 3.5km의 방조제가 들어서 거대한 군내호와 대규모 간척지가 생겨났다. 아치섬, 보리섬 등은 어느새 육지의 똥뫼(童山)가 되어 버렸다.

장승은 그 마을 사람들 얼굴을 닮는다


동계안을 살펴보는 이장 주광운씨
   장승상을 깎거나 조각하는 주민은 한 사람이 아니고 그 마을에 사는 여러 주민들이다.
   못생기면 못생길수록 또 상식을 벗어나고 파격적일수록 돌장승이 갖는 멋과 맛은 나름대로 더 깊어진다. 물론 사찰 입구나 마을 들머리에서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못된 것들을 물리치고 막아내야 하는 역할이라 조금은 무섭게도 그려진다.

   현재 이장을 맡고 있는 주광운(49)씨는 마을에 미곡처리장을 설치해 미질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제법 성깔도 부리지만 동네 노인당에 쌀을 수시로 기증해 노인들이 공동식사를 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마을조직으로는 청년회와 부녀회(이예심), 덕병장승보존회(회장 이재운.64)가 있다. 상조계는 95년 통합했으며 노인회장은 정한철(84)씨가 맡고 있다. 독거노인이 5분에 최고령자가 주양단(95세)씨다. 문화유적으로는 보호수로 지정된 해송림이 있다. 음력 1월 14일 지내는 마을 당제와, 장승제, 거리제가 잘 알려져 있다.

   ‘돌부처 살찌고 안 찌고는 석수쟁이 손에 달려 있다’는 말처럼, 장승을 세운 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심성과 염원이 장승의 외형에 숨김없이 드러난다고 한다. 대부분의 장승들은 그 시대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덕병리장승은 일 많이 한 농부처럼 호리호리한 체형이다.

   장승은 당산신에 비해 약간 하위신으로 인식돼 있기 때문에 만들 때마다 정해진 틀이 없어, 지역마다 모습이 다르다고 한다. 마을 나들목이나 성터나 사찰 입구에서 수문장 노릇하고 있던 돌장승들이, 서울 졸부들의 욕구충족을 위해 양상군자들의 손을 타 현장에서 사라져 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산중의 동자석들도 수난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중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수호장군인 자신들이 도적들의 표적이 되어 매매되는 석물로 팔려 가고 만 것이다.

   해마다 소 턱뼈를 목에 매달고 마을을 지켜내던 덕병리 돌장승도 1989년 어디론가 실려 갔다. 제 자리를 떠나면 그 기능도 위엄도 지워지기 마련이다. 누구네 정원에서 발린 소뼈냄새도 못 맡은 채 천덕꾸러기로 방치되어 있을 모습이 선하기만 하다.

덕병리 당집 - 마을 윗길에 있다. 주민들은 새로 짓기를 바란다.

   겨울철이면 해마다 덕병 앞바다로 찾아오던 수백마리의 고니도 이제는 보기 힘들다. 군내호가 들어서기 전 까지만 해도 수유리와 덕병리는 겨울철 고니의 주된 서식지였다. 많이 날아오는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그러나 '고니 도래지'가 낚시꾼과 농약 등으로 위협받고 있기도 하다.
   몇 년 전에 천연기념물 보호구역 인근에 맹독성 농약을 사용하는 불법 경작 배추밭과 대파밭이 방치되고 군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덕병리 일대에 유해조수포획허가까지 내줘 천연기념물 등 야생조류가 밀렵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산 너머 월가리에 잠실천과 월가천의 합류지점에 보가 있었는데 이를 이씨보라 하였다. 74년 가을 경지정리로 사라졌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월가리 사는 청춘과부 이씨가 아들 둘을 기르고 있었는데 떡절이 사는 남자를 사모해 이씨부인이 오가는 밤길에 늘 버선이 젖었다.
   이를 안 자식들이 몰래 보를 만들었다. 뒤늦게 이를 안 부인은 아들의 효심에 감동하여 다시는 딴 마음 먹지 않을 것을 혀를 깨물어 다짐하고 삭발한다.
   그 후 두 아들을 열심히 키워 장가보낸 뒤 엄동설한 추운 겨울날 찬물로 목욕재개 흰옷으로 갈아입고서 한때 수절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며 자결을 하였다. 그 이튿날 눈 속에 묻혀있는 이씨부인의 깊은 뜻과 두 아들의 효성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모자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돌을 깎아 이씨보라 새겨 놓았다고 한다.

효불효의 전설은 묻혀가고
적극적인 삶과 비보 풍수가 인물을 낳고
천연기념물 101호 고니가 찾던 곳


   둔전리는 옛날 벽파진 등 수군의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한 농지가 있던 곳이라 둔전(屯田)이라 했으며, 이를 관리하는 병사가 있던 곳이 인근의 덕 병리였다.
    1445년 이 동네 뒤산에 국영목장이 개설되고 둔전으로 간척사업이 이뤄졌던 것 같다. 목장을 위해 신안주씨가 들어오고 간척을 위해 밀양손씨가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진도 향토전자대전 자료)
   마을 안에는 박헌기, 주병량 설중빈의 행적기념비가 있다. 주된 특산물로는 쌀 봄배추 등이다.

덕병리 석장승


   높이가 대장군 140cm, 진살등 195cm(원래)
   그러나 신규로 세운 석장승은 현재 대장군이 240cm , 진살등 220cm이다. 둘레는 대장군이 123cm, 진상등 약 130cm(원래)였으나 현재 대장군 115cm, 진상등 약 97cm이다. 요즘 체형으로 좀 가늘어졌다.
   매년 정월 보름에 동제를 모시고 있다. 진살등이라고 부르는 곳에 언제 세웠는지 모르는 두 주의 장승이 서 있었다. 그러나 1989년 장승을 도난당했다.
   지금 서 있는 장승은 4년이 지난 후 마을에서 협의를 해서 새로 세운 것이다. 석수가 잘못해 살 자를 제(祭)자로 잘못 새겨 고쳐놓았다. 마을에서는 ‘장성’이라고도 부른다. 장승에 한자로 장성(長城)이라는 글자가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93년에 다시 세운 장승은 길을 사이에 두고 소나무가 우거진 들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마을에서 보았을 때, 좌측에 있는 장승이 ‘대장군(大將軍)’, 우측에 있는 장승이 ‘진살등(鎭殺嶝)’이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동제인 망제(望祭)를 모시면서 장승의 목에 왼새끼로 소의 턱뼈를 걸어둔다. 예전에 마을에서 소를 잡아 사용했을 때는 장승에 소의 피를 발랐다.
    이전 새끼와 뼈는 깨끗한 곳에 버리거나 아니면 땅에 묻어버리기도 한다. 턱뼈를 거는 까닭은 잡귀가 그것을 무서워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경비는 인구전을 거둬 충당했다.

가슴 아픈 ‘가심재’ 전설도 잊혀지고


   진도는 서남부 해상을 거쳐 이동하는 백조 집단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식공간을 제공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최근 간척과 매립으로 새들의 먹이가 줄어들자 백조들은 근처의 해안으로 흩어져 겨울을 나기도 한다. 백조가 많이 날아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주요지명을 보면 우선 가심재(고개)가 있다.
   덕병에서 분토리(흙이 좋아 명당자리가 많다는 곳으로 임진왜란때 이곳 흙을 시아바다 앞에 뿌려 쌀뜬물로 보이게 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의 분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옛날에 전통혼례를 치르면서 가마를 타고 분산마을쪽으로 넘어가야 할 때에도 이 고개를 통해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고개로 넘어가면 결혼을 해도 부부생활이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고개에 마귀가 있어 결혼한 부부들의 가슴을 짼다고 해 가심재라 불렀다. 이에 결혼할 때 가마는 가심재를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건넌들골짝은 건넌들 위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이 곳에 마을 주민의 집 두 채가 있었지만 현재는 흔적이 없어졌다. 이 곳에 덕병마을의 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이곳이 집터가 좋다고 하여 정착을 하였으나, 간혹 살인 등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므로 지관에게 묻자 땅이 좋지 않다고 하여 현재의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주민들이 옮겨왔다고 한다.
   구러실[들] 배나뭇들 서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한해(旱害)가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들 바닥이 물로 흥건했다고 한다.
   너먼들[들] 행깃 등 동쪽에 있는 들을 일컫는다. 신촌 남쪽에 있는 저수지(너먼들방죽) 밑이 되기도 한다. 등기부 등본을 떼어보면 세등리 번지로 되어 있다고 한다.

본디 마을이 들어섰던 곳, 지금은 야산이다

   눈썹바위[바위] 덕병 남쪽, 수리봉에 있는 바위를 말한다. 눈썹처럼 생겼으며, 제보자에 따르면 예전에 눈썹바위를 만지면 안질이 생긴다고 하여 절대 못 만지게 하였다고 한다.
    당매는 덕병 서북쪽에 있는 늪으로 현재 덕병리 장승이 서 있는 부근의 조그마한 산을 당매라고 부른다고 한다. 덕병염밭은 덕병 북쪽에 있는 천일염밭을 말한다. 지금은 염전이 없어지고 농토가 되었다. 장새걸 옆에 있었다고 한다.

   달마산(達磨山)[산] 덕병마을 뒤쪽에 있는 산으로 주민들은 달마산 또는 덜매(산)이라고도 부른다. 이 산 중앙 아래쯤에서 충제(蟲祭)를 매년 모시고 있다.

예언이 맞아떨어진 곳 ‘곶이’


   모재[고개] 덕병에서 분토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모재 밑의 골짜기를 모작골이라 한다.
   배나뭇들[들] 덕병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지명총람』에 의하면 이 들에 예전에 배나무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사당샘[우물] 건넌들에 있었던 샘으로 사당샘이라고도 한다. 예전에 이 물을 길러다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명총람』에는 서당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적골[골] 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달마산 산자락에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아이들이 홍역 등으로 죽으면 매장을 하지 않고 돌로 쌓아두었던 곳이라 한다.
   솔갯재[고개] 덕병리에서 분토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예전에 혼례를 치를 때는 가심재를 이용하지 않고 이 재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신촌(新村)[마을] 덕병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을 이렇게 불렀다. 예전에 14가구 정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은 작물을 재배하는 농토로 변했다.

   양알골[골] 덕병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 덕병저수지 위쪽을 말한다. 가심재와 솔갯재 중간에 있는 골짜기다.
   여시굴[굴] 모작골에 있는 굴로 여시(여우)가 살았다고 『지명총람』에 기록하고 있으나, 현지인들은 여시굴이라 하지 않고 성적굴이라 한단다.
   짱뚱샘[우물] 예전의 신촌에 있는 샘으로, 현재는 샘의 형체만 남아 있다. ‘짱뚱’이란 사람이 팠다고 『지명총람』에 기재되어 있다.
   평풍바우[바위] 덕병 남쪽(마을 뒤쪽), 달마산에 있는 바위로 병풍처럼 생겼다고 한다.
   행깃등[등] 신촌 뒤에 있는 나지막한 등성이를 말한다.

   덕병마을의 중요한 터전이 되었던 배나뭇들은 원래 해발 15m의 당뫼와 달마산 자락을 연결한 것이다. 이 덕병마을의 들녘을 배나뭇들이라고 했다. 먹는 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는 배[舟]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사주대 뒤의 사구(砂丘)열은 소나무가 자생하기 좋은 곳으로 안면도처럼 좋은 목재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섬이었던 당뫼는 육계도가 되어 육지가 되었고, 그 사주대 위엔 지금 보호림으로 보호되고 있는 소나무숲이 자리하고 있다.

소뼈를 목에 건 덕병 장승
   마을의 상징인 돌장승은 싱싱한 회백색의 화강암석 질감이 젊게만 보인다. 장승은 살기를 막아주는 ‘진살등’으로 지금의 위치는 마을 어귀가 아닌 마을 밖에 서있다. 위치로 보아 과거 마을 어귀보다는 필연 바다 쪽 어귀에서 드나드는 뱃길의 안녕을 기원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배나뭇들이라는 지명이나 과거 덕병 말 목장이 있었다는 점, 바닷가에 위치하고, 그 해안의 지형적 증거로 비정한 것이다.

    세종실록을 보면 도순찰사 김종서가 말 목장을 짓기 좋은 곳으로 세 곳을 복명하는 가운데 지목한 “해원(海原) 동쪽으로부터 덕병평(德柄平) 사이에 200필을 기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은 해안까지 완만한 산록 완사면에 사질토양으로 목초가 잘 자랄 수 있고, 뱃길이 통할 수 있는 데다 고두산에서 내려온 덕병천 물을 수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 윗길인 군도 10번 을 타고 더 서쪽으로 가면 분산과 월가리 지나 진도읍으로 갈 수 있다. 이 곳 주민들은 주로 진도읍장과 상설시장을 이용한다. 축산은 다섯 가구 정도가 있다. 대부분이 60세 이상의 노인들로 고령 인구 비율이 높다. 다문화가구도 세집(일본 1, 필리핀2)이나 된다.
    밭이 약 62ha, 논이 67ha로 다른 마을에 비하여 논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마을의 위치는 북위 34도, 동경 126도에 자리해 있다. 남동쪽이 배산인 고두산이 막아서고 북쪽이 바다 쪽으로 터져 있어, 겨울바람인 북서풍이 매섭게 분다. 그로 인하여 대개 마을의 가옥들은 전망 좋은 북쪽보다 높게 올려다 보이는 남쪽 비탈면을 바라보고 있거나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새마을형 개량 가옥이 많아, 돌담 등 정겨운 시골풍경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옛것이지만 깨끗한 손길로 정겹게 다듬어진 가옥이나 돌담길 같은 것들이 도시와 비교될 수 없는 시골, 즉 민속마을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풍경이 점차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마을 가옥구조는 대문에 들어서면 안채와 바깥채로 되어 있어 남향과 서향을 향해 열려 있고, 동향과 북향은 대부분 닫혀 있다. 공공건물로는 마을회관과 구판장 경로당, 창고, 사료 저장소 등이 있다. 덕병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로는, 1962년 군내초등학교 분교로 개교한 금성초등학교가 있다. 중학교는 군내중학교로 좀 더 올라가야 한다. 이 마을출신 이윤환(전 농어촌공사)씨가 해마다 동천장학금을 주고 있다.

    덕병리 출신 유명인물을 살펴보면 현직에 강형민(부부 고시합격) 최모 검사가 있으며 변호사는 김병문(46) 주수옥 손모 등 세 사람이나 된다. 작가로는 윤모 이상록씨가 있으며 운동선수로는 프로야구 LG선수와 프로축구 수원의 이모선수가 있다.
    이백만씨는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국정홍보처 차장에 이어 청와대 홍보특보를 지냈다. 청와대브리핑에 《지금 집을 사면 낭패》라는 글을 올렸다가, 본인 역시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의혹을 받아 사임했다.
    지난 해 전국체전 청소년부 역도에서 남매가 메달을 타기도 했다. 목포대 이모 약대 정모교수가 있으며 교육공무원(교장)도 3명이다. 재작년 미스코리아 선에 입상한 여인(현 SBS아나운서)도 덕병 출신이라고 한다.
   전설들은 당대 사람들의 열망이 담겨 새로 쓰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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