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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의 영화로 보는 세상


[역도산]의 생애를 주워 모은 논픽션에 머물다.
김영주 2004/12/27 09:57    

나의 초등시절에 철없이 그리던 우상은 철인과 로봇 · 외팔이와 팔도사나이 · 김일 선수였다. 중등시절은 그 자리에 탱자나무집 선영이 그리고 축구의 펠레와 차범근 · TV만화영화 주인공들이 차지했고, 고등시절엔 다리건너 갈래머리 소녀 그리고 이소룡 · 포크송가수 · 고교야구스타였다.

프로레슬러 김일선수의 인기는 대단했다. 가요에서 남진과 나훈아, 권투에서 김기수, 영화에서 문희 남정님 윤정희와 신성일 신영균 박노식 장동휘가 있었지만, 우리 동네에선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은 인기는 김일이 최고였다.
동네사람들이 텔레비젼 앞에 모두 모였던 적은 아폴로11호 달 착륙과 김일 레슬링 중계였다. 대여섯 번쯤으로 기억한다. 그 때마다, 김일선수가 악당 레슬러나 가면 레슬러에게 몰리고 당하고 있노라면 치를 떨고 이를 갈며 “박치기!”를 연거푸 소리 높여 갈구했다. 그가 역전을 일으키며 마침내 ‘박치기’로 끝장을 보는 순간은, 우리도 함께 마빡에 힘을 빠악 주고 “박치기!”하며, 어른이고 아이고 모두 한 몸 한 뜻으로 만세를 부르고 환호성을 질렀다.

내 기억에 그런 환호성은 월드컵축구 예선전에서 이스라엘과 연장전의 차범근 결승골 그리고 75년 대통령배 고교야구 광주일고 결승전에서 김윤환의 3타석 연석홈런 그리고 지난 월드컵의 16강 8강 4강에서 들었다. 남녀노소 얼싸 안고 가슴 벅차고 난리법석을 피웠다.(물론 내 인생 최고의 기쁨은 노무현의 광주경선 1등과 대통령 당선이다. 이 기쁨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

내 동생은 “앞뒤꽁치 삼천리, 뺑돌아서 구천리”인 짱구였다. 동네에서 ‘뚝보’로 소문났고, 싸움마당에선 “김일 박치기!”로 무기를 삼았다. “너 커서 김일 되겄다?”는 동네 어른의 장난어린 부추김에 동생은 더욱 신났고, 울 엄니도 “그래 이 뚝보야! 지발 김일이 되어서 이 에미 호강 좀 시켜 주라!” 그래서 우리 동생은 한 시절 벽돌로 박치기 연습을 한 적이 있다. 참 얼척없이 무모했지만, 그 심성이 눈물겹게 소박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가난했지만 소박했던 시절은 흘러 흘러, 엄혹하게 그저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 그리고 5.18 광주의 한맺힘 속에 아둥바둥 살아가며 초라했던 시절 그리고 아름다운 산천을 짓밟으며 기름진 음식과 흥청거리는 네온불빛 사이에 콘크리트에 짓눌린 논둑길과 음습하게 우울한 골목길들에서 방황하던 시절. 그리고 그렇게 쏜살같이 변해가는 그런 세상의 옳고 그름과 밝음과 어둠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보대끼며, 감당키 어려운 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 심성을 추스리느라 정신없는 이 시절에. 그야말로 까아맣게 잊고 살았던 ‘역도산’이 영화로 돌아왔다.

그 시절 김일의 인기 뒤에는 항상 역도산이라는 이름이 영웅의 대명사로 뒤따라 다녔다. 우리의 영웅 역도산이 일본놈 깡패에게 칼 맞아 죽었다고 했다. “일본놈 개-시끼!”라는 막연한 욕설로 ‘막무가내 민족사랑’을 불태웠다.
어린 시절의 무턱댄 영웅이 이 어른시절엔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김일 레슬링 중계와 영화가 마구 떠올랐다. 만화 [타이거 마스크]와 싸우던 선수들의 묘기나 무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역도산이나 김일로 우리나라를 무시하지마라는 악바리 근성을 불태우던 시절. 그래서 서양이나 일본에게는 열등감을 깊이 감추었고, 우리에게는 그렇게라도 스스로 위로하고 싶었던 시절. 우리는 그런 유치한 열등감과 억지 자위로 맨땅에 헤딩하며 깡다구로 일어서서, 이제는 우리도 이 만큼 먹고 살게 되었고 그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민주화의 새벽을 열게 되었으니, 그 시절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막무가내 나라 사랑’을 지금은 터놓고 되돌아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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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은 그의 일대기를 있는 그대로 주워 모아 놓은 논픽션 같았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설움 받다가 그렇게 출세했으며 그렇게 무너지고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구나! 그런 역도산의 생애에 푸욱 빠져들지 못하였다. 그런 설움과 역경쯤은 내 삶에 양념 발라 뻥쳐도 만들 수 있는 이야기이다. 설사 내 삶에 그런 골과 그림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성공시대의 신화는 수많은 소설 드라마 영화에 수두룩하기에, 그런 정도 이야기는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누구나 자기 설움은 굽이굽이 사무치고 사연사연 열권의 책이다. 포인트는 그런 사연들을 무턱대고 긁어모아 쭈욱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자기 그림을 그려내는 자기의 터치와 색깔을 보여주는 것이다.

먼 훗날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런 영웅은 극우적 정권이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합리화하려고 양념 바르고 뻥 튀겨서 일부러 부풀려 만들어낸 ‘스타탄생 신화’의 희생양이요, 그런 스타를 뒤에서 부채질하며 떡을 주무르고 떡고물을 주어먹는 사회시스템의 한 시절 노리개이다.
우리는 그런 체제이념의 의도적 조작이나 사회시스템의 구조적 속성을 까맣게 모른 채, 그들의 부채질에 들뜨고 휘둘리며 덩달아 놀아난 것이다. 아직은 덜 익은 재주꾼에게 이런 사회구조적 통찰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이라는 걸 인정한다손치더라도, 일제 식민지 지배 그리고 전쟁의 파괴와 그 복구 사이에 끼어든 매몰찬 시대상과 벼랑 끝 인간군을 헤집는 감성적 고민마저도 깊어 보이지 않는다. 송해성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겉재능은 제법 갖추고 있지만, 시대상이나 인간상을 읽어내는 속내공이 아직 숙성되어 있지 못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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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못 봐줄 영화는 아니다. 그의 겉재능은 보아줄만한 괜찮은 영화이다. 간노회장에게 눈길을 받으려고 생명을 거는 치열한 승부수에서 역도산의 설움에 겨운 집념이 사무치게 다가오기도 한다. 스모의 좌절을 딛고 레슬러로 백인을 때려눕히는 컴백홈은, 2차대전의 참패로 무겁게 가라앉은 일본을 사꾸라꽃 피우듯이 환호작약으로 타오르는 열광의 도가니를 일으킨다.

60년대 가난으로 찌들린 우리나라에 김일 레슬링의 박치기, 그리고 70년대 지역차별의 설움으로 짓눌린 전라도에 대통령배 고교야구에서 김윤환의 3타석 연속홈런, 그리고 온 지구촌에 이젠 가난의 멍에를 훌훌 벗어던져 보이고픈 지난 월드컵 16강 8강 4강 진출로 출렁이는 붉은 인해물결. 그대로 빼어 박았다. 유난히도 그 장면이 우리 60년대 김일선수의 박치기 장면하고 너무나 빼다 박아선지, 그 때 그 시절에 그대로 오버랩 되어 울컥한 감동이 밀려왔다.

설경구의 고생스런 연기도 대단하다. [오아시스]의 삐쩍 마른 삐딱함을 기막히게 연기해낸 설경구가 이번엔 거대한 몸집의 악착스런 승부욕을 비지땀으로 고생스레 연기해낸다. 그의 일본어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미묘한 감정의 터치까지도 실어 담았다. 그러나 장동건이 [친구]에서 깊었으나 [태극기...]에선 고생스러웠듯이, 설경구도 [박하사탕]과 [오아시스]에서 그지없이 깊었으나 [역도산]에선 너무나도 고생스러웠다.
간노회장의 연기가 [감각제국]에선 그러려니 하였는데, 이번엔 그가 소름끼치게 다가왔다. 나는 닳고 닳아진 음모가의 무표정한 얼굴에 얇게 내려 깔은 눈두덩 아래로 보일 듯 말듯 흐르는 눈초리를 칠흙밤에 도사린 호랑이의 시퍼런 눈빛보다 더욱 몸서리친다.(썬그라스에 숨은 눈빛은 아주 싫어한다.) 그의 얼굴과 몸짓은 얼음장을 매서운 칼바람처럼 스치는 간악한 카리스마의 극치를 드러내는 예술이었다. 안으로 깊이 움츠려드는 ‘축소 지향형의 일본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연기이겠다. 설경구는 감독의 역량에 따라 오르내리는 연기로 보이고, 간노회장은 감독의 역량을 넘어서는 연기로 보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의 삶이 깃들면, 그냥 그대로의 산과 물이 아니다. 그런 세상에 배어든 자기의 관점과 색깔을 담아야 한다. [역도산]에는 그게 없었다. 수많은 스타탄생의 신화에 또 하나를 주워 담아 펼쳐 보였을 따름이다.


독자 의견 목록
1 . 김영주님, 율전 2004-12-27 / 12:40
2 . 역도산을 보고 최성환 2004-12-28 / 10:11
3 . 역도산 버버다리 2004-12-28 / 19:40
4 . 아무래도.. 율전 2004-12-29 / 01:01
5 . 율전 최성환 버버님 그리고 영화관심분들께 김영주 2004-12-30 / 15:40
6 . 잘 알겠습니다. 좋은 글 부탁합니다. 최성환 2005-01-03 /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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