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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의 영화로 보는 세상


영웅과 천재 그리고 공주병과 왕자병
김영주 2004/10/09 12:14    

[킹 아더]는 별 볼 일 없고, [아이 로봇]은 재미가 괜찮지만 허전한 구석이 많으며, [반 헬싱]은 잡다한 억지 이야기가 뒤섞여 어수선한데다가 화면충격에 너무 힘을 주어 유치하고 구토증이 느껴질 정도로 어지러웠다. 이야기 할 맘이 나지 않는 영화들이었다.

[로드 무비]에서 김인식 감독의 모래먼지 날리는 황량한 스타일이 김혜수의 도발적인 육체와 연기를 어떻게 콘트롤하는지 보고 싶어 [얼굴없는 미녀]를 점찍었지만, 일에 묻혀 놓쳐 버렸다. 지난 [스파이더맨]에서 아쉬움으로 남겨둔 ‘영웅주의와 스타탄생’의 신화에 숨은 미국 공화당 이념을 이야기해 보련다.

스무 살 끝자락 무렵일까? 어린 시절에 만났던 동화책이나 위인전이 ‘나쁜 책’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면서 종교와 성인이 싫어졌다.
위인이나 성인이 “엄청 훌륭한 사람”이라고 워낙 널리 깊이 박혀 있으니, 감히 내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아스라이 높게 올려놓은 종교단체나 학교교육이 더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류층이 떵떵거리는 권세와 넘쳐나는 재물을 오래토록 누리려고, 보통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구슬리고 합리화하는 걸로 보였다. 이념과 신앙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공부가 깊어지면서, 그게 사회적 서열구조를 가파르게 유지하려는 도구로 매우 유용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자와 빈자,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자리의 높낮이, 학벌의 높낮이, 재능의 높낮이, 인종의 높낮이, ...가 가파르고 굳건해야 할 강한 서열적 사회구조 말이다.

근대사회와 현대사회를 말함에 가장 으뜸 되는 화두는 ‘자유와 평등’이다. 그런데 그 자유와 평등이 겉낱말은 같지만, 속내용은 자본주의의 보수와 진보 그리고 사회주의의 보수와 진보에 따라 전혀 다르다. 미국 공화당 같은 자본주의 보수당은 ‘자유’라는 낱말은 얼마쯤 버티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핵심을 피해가고 있지만, ‘평등’이라는 낱말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그래서 공화당은 자유와 평등을 대립시켜, 평등이라는 낱말을 사회주의에 아예 패스해 버리고 핵심을 흐리면서 물어뜯는다.)
이렇게 공화당이 평등을 패스해 버리고 자유라는 낱말로 얼마쯤 버티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핵심을 피해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영웅주의와 스타탄생’의 신화를 문화적 코드로 세뇌작업 하는 것이다.

그 전형이 바로 ‘신데렐라 이야기’이다.
신델렐라는 유전자가 상류층인데, 어찌어찌하다가 부엌데기라는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구렁텅이에서도 상류층 유전자를 잃지 않고 있다는 걸, ‘바깥일로 바쁜’ 아빠만 모르고,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동물도 알고 꽃도 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며 상류층 유전자를 잃지 않은 신데렐라는 마침내 ‘제 자리’를 찾게 된다. 그녀의 쓰라린 부엌데기 삶은 오히려 아름답고 찬란함을 더욱 빛내준다.

이 이야기에는, 중세를 깨고 근대가 꿈틀거리는 태반에,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떠오르는 부자 시민계층과 기울어가는 중세귀족계층이 만나는 접점에서 사회 주도권의 새로운 협력체제를 만들어 가는 '정치적 결탁'이 숨어 있다.
그 협정의 엣센스가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레주'이요(근엄과 품격의 솔선수범, 가부장적 기사도와 헌신적 사랑, 자선 기부와 자원봉사, ... ), 긴 세월을 사회구조적으로 유지해가는 주춧돌이 혼인과 스쿨이나 써클을 엮어 사교클럽으로 다져가는 인맥이다.

부르주아세력의 이데올로기를 문화코드로 세뇌작업하는 작품으로 [신데렐라]가 가장 유명자자하지만, 이게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건 [미녀와 야수]이다.
[신데렐라]나 [미녀와 야수]에서 남녀의 역할을 그대로 바꾸거나 살짝 손질한 것이, 우리가 수없이 만나는 '영웅과 천재 이야기'이다.
[타잔]부터 [스파이더맨]까지. 이건 미국 공화당 이념과 그대로 맞물려 있다. [슈렉]은 이걸 강하게 꼬집고 비틀었다.(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이런 시각이 이야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초점을 잡아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 예술사에 총체적으로 아주 중요한 포인트이다.)

미국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런 보수적 영화들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이런 ‘가부장적 영웅’이라는 용광로에 녹여내어 틀에 붓고 담금질하며 치고 쪼으고 갈고 다듬는다.
껍질만 다르고 알맹이는 지겨울 정도로 똑 같은 수많은 이야기들. 그 달콤한 환상과 눈요기가 싫지 않은. 종교와 학교 그리고 매스미디어를 통해 동화 소설 만화 드라마 영화 스포츠 광고로, 현실과 환상을 헷갈리게 취하도록 ‘문화적 마약’을 끊임없이 주사한다.

그렇게 세상사람들은 돈독이 오른 ‘공주병과 왕자병’에 점점 적셔든다.
그 허상에 아등바등 매달리고 시달리며 살아가다, 채우지 못한 욕망을 달래느라 이런저런 취미생활이나 도피처로 몸과 마음을 추슬러 보거나, 넘치는 말초적 감각주의로 황폐해진 도시그늘에 숨어 음습한 퇴폐로 몸과 마음을 달래지만, 남는 건 욕망의 갈증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허영인생’이거나 뒤틀린 오기와 짜증나는 불평으로 가득 찬 ‘바닥인생’이다.

사회가 병들면, 개인이 병든다.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정신병이 '공주병과 왕자병'일 것이다. "잘 살아보세!"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일어난 '근대화 성장주의'가 낳은 배설물이다.
어린 소년 소녀만 걸리는 병이 아니라, 어른이 되면서 뒤틀려서 더욱 음습한 모습으로 또아리 트는 병이다. 우리 애들도 걸리기 시작하고 있다. 사회구조적으로 퍼져가는 전염병이라 막을 재간이 없다. 15살이 넘으면 그 병의 무서움을 천천히 일러줄까 한다. 아직 구체적인 백신프로그램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 짧게 쓰려니 글에 무리가 많습니다. 자세하고 짜임새 있게 알고픈 분에게, 어색하지만 제가 쓴 책을 소개합니다. [시장주의, 그 신화와 환상], 인물과 사상사, 1999.(특히 제5장 현실시장사회와 시장만능주의) 시장주의의 신화와 뿌리에 숨은 위선과 맹신을 사회문화사의 측면에서 파헤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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