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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의 영화로 보는 세상


@[황해] 잘 만들었지만, [추격자]보다 못하다.
김영주 2010/12/26 17:32    

95년 즈음에, 베이찡 변두리에서 석 달쯤 머물렀던 적이 있다. 을씨년스런 어느 겨울밤, 조선족 몇 명하고 술잔을 기울이다가, 자기 동네 깡패들 이야기가 나왔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깡패들 쌈판 이야기로, 나도 한 축 거들며 끼어들었다. 이야기가 점점 찐하게 무르익어갔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수록, 그들이 꺼내어 들려주는 그 이야기에 난 점점 주눅이 들다가 압도당했고, 마침내 그 잔혹함에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그 잔혹함이 그들의 순박함에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생피 냄새가 피어오르는 그 장면들에, 화들짝 놀라서 절로 손사래를 치며 온 몸을 바르르 떨었다. [황해]에서 그걸 보았다.

[추격자]에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공포영화는 거의 보지 않고, 잔혹영화는 작품성으로 소문이 자자한 영화 몇 개만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눈을 가리며 겨우 겨우 보아낸다. 엉겁결에 만난 모니카 벨루치의 [돌이킬 수 없는]이 무척 힘들었는데, [추격자]도 이에 못지않게 힘들었다. [황해]는 [추격자]보다 못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스토리 전개를 비비꼬아서 모호하게 늘어뜨리고, 나중엔 스토리 전체가 뒤엉켜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기발한 반전이 아니라 관객을 어리벙벙하게 뭉개버린다. 초짜 감독이 첫 작품으로 대박을 터뜨리며 ‘천재’라는 찬양에 겨워서, 이번에 자기 자신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갑자기 불어난 제작비를 감당할 체력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걸까? 방대한 스케일과 물량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벼랑 끝에 놓인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 . . . [추격자]처럼 처절하게 쫓고 쫓기지만, [악마를 보았다]처럼 마냥 잔혹하면서 별로 와 닿는 게 없다. 150분을 그리 지루하지 않게 상당히 긴박하게 이끌어 가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선 너무 지치고 피곤했다. 한 숨 푸욱 자고 싶었다.

<예고편 보기>

삶의 숙성은 별로 이지만, 잘 만든 영화이다. * 영화기술 : A0.( 부담스러울 정도로 스토리 전개를 비비꼬지만 않았다면, A+를 줄 수도 있었는데 . . . ) 하정우와 김윤석의 ‘리얼한 존재감’을 선명하게 잘 그려냈다. 액션이 [아저씨]처럼 인공 액션이 아니라 [친구]처럼 리얼 액션이다. 하정우, 무심한 듯이 무덤덤하게 빈둥거리다가 문득 들개 같은 눈빛을 돋우며 으르렁거리면 영화가 활활 타오른다. 김윤석, 육덕 크고 뱃심 좋은 몸집으로 꾸부정히 등을 돌리며 빈정대다가도 심지에 불이 붙어 폭발하노라면 영화 전체가 흔들거린다. 하정우와 김윤석, 그 동안도 참 좋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꽃피어난 듯하다. 그들의 액션뿐만 아니라 표정과 대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배경이나 의상과 소품 모두 다 완결해 보인다. 조선족 조연들에게 깔린 꾀죄죄하면서도 원초적으로 거친 모습이 사뭇 실감났고, 여배우들이 예쁘장하게만 나오지 않고 실제 생활인처럼 실감나게 그려낸 것도 좋았다. 배우들의 연기력을 뽑아내는 솜씨가 매우 돋보인다. 자동차 추격 장면도 할리우드영화에 버금갈 정도로 볼만 하다.


한반도가 반쪽으로 갈라져서 이토록 으르렁거리며 서로 멱살잡이를 하는 세상이 많이 불편한데,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이 짙은 그늘아래 신음하며 핏빛 낭자해진 모습에 맘이 더욱 착잡하다. 마냥 잔혹하기만 하면서 별로 와 닿는 게 없어서 삶의 숙성을 낮게 매기려고 했는데, 한국 땅에서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어서 삶의 숙성을 한 단계 높게 매기기로 했다. * 삶의 숙성 : 공화파 F, 민주파 B0, 사회파 B0. * 대중재미 : 이 정도 잔혹함을, 잘 견디는 사람은 A0,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B0, 진저리치는 사람은 C0쯤 되겠다.( 내 재미는 B+ )

나홍진 감독의 작품은 삶의 숙성이 그리 깊진 못하지만, 영화기술만큼은 매우 뛰어나며, 대중재미를 이끌어내는 능력도 상당히 뛰어나다. 보수 쪽으로든 진보 쪽으로든, 이젠 삶의 숙성이 깊어진 그의 작품을 만나고 싶다. 영화로 만들어낼 만한 소재가 무궁무진함에도, 이런 잔혹극에 그 뛰어난 재능을 탕진하다니, 안타깝고 한탄스럽다. 게다가 쥐나 개나 마구잡이로 그의 이런 지독한 잔혹함을 흉내 내는 풍토에 앞장 서는 꼴이 되었으니 통탄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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