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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의 영화로 보는 세상


[하얀 거탑]의 권력에 짙게 내려앉은 음습한 먹구름
김영주 2007/02/19 14:56    

TV를 ‘바보상자’라고 하지만, 좋은 프로그램도 많다. 난 아침마다 맨 먼저 신문의 TV프로그램을 펼친다. 빨간색연필로 볼만한 프로그램을 체킹하고, 그 중에서 녹화할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나선, 보고 지워버릴 프로그램과 오래 간직할 프로그램을 구별하여 표시한다. 다음은 여러분께 꼬옥 권하고 싶은 프로그램이다. 돈을 싸매고 찾아도 구하기 어려운 ‘지성과 감성의 보약’이다. 때론 BBC의 [살아있는 지구]처럼 열 권의 책보다 나은 황홀한 프로그램이 걸리기도 한다.( 좀 과격한 말을 동원하여 여러분께 강요하고 싶지만 참으렵니다. 자녀들에게 강요하여 함께 보시면 더욱 좋습니다. 시간이 서로 맞지 않으면 녹화해서 함께 보는 노력을 넉넉히 보상하고도 남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프로그램입니다. ) KBS의 화 밤11:30 [세계걸작다큐멘터리] · 토 아침10시 [걸어서 세계속으로] · 토 저녁8시 토요스페셜 [살아있는 지구] · 일 아침7시 영상포엠 [내 마음의 여행] · 일 저녁11시 [역사기행]과 [일요다큐 산] 그리고 EBS의 화 밤12:45 [세계의 미술관]( 클래식을 좋아하신 분은 EBS의 [클래식 음악기행]이 아주 좋습니다. EBS의 [지식채널] [공간] [시네마 천국]도 덧붙여 권장합니다. )

나머진 어지간한 재미나 호기심이 아니면 거의 보지 않는다. MBC 주말드라마 [하얀 거탑]이 남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TV드라마에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관심을 꺼버렸다. 우연히 일요일 아침에 일본판 [백색 거탑]을 보게 되었다. 확 땡겼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일본판 원본소설과 만화가 있단다. 한국판 [하얀 거탑]이 훨씬 재미있다는 말이 무성하였다. 이미 10회까지 방영되었단다. 만사를 젖히고 이미 방영된 [하얀 거탑]을 찾아보았다.


*****

일본판보다 한국판이 여러모로 두드러진다. 한국판을 보지 않았더라면, 일본판도 재미있게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판을 보고나니 일본판은 더 이상 땡기지 않았다.( 설사 그렇더라도, 뉴튼이 자기의 만유인력이론을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서서 이룩한 열매”라고 하였듯이, 한국판도 일본판 거탑의 지붕 위에 다시 몇 층을 더 높였다는 걸 잊지 않아야 하겠다. ) 음악이 드라마의 긴박함을 훨씬 잘 살려낼 뿐만 아니라, 훨씬 깔끔하고 산뜻하다. 수술장면이나 병원분위기 그리고 엑스트라의 작은 터치가 훨씬 실감나게 정성스럽다. 좋은 작품은 손가락의 움직임이나 옷자락의 펄럭임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스토리 흐름의 길고 짧은 호흡도 좋고 그 사이사이를 메꾸어 가는 잔물결마저도 일본판보다 훨씬 매끄럽다. 조그마한 틈새에까지도 연출자의 정성이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의 캐릭터에 연기자가 매우 적합해 보인다. 조연들의 연기도 아주 자연스레 거의 빈틈없이 잘 짜여져 있지만, 중심인물들이 주어진 캐릭터에 더 이상 어울릴 배우가 없겠다할 만큼 적합해 보인다.( 차인표의 연기력이 항상 그렇듯이 고지식하고 굳어 있어서 좀 서운했다. )

우리가 흔히 낮과 밤을 쪼개어 말하지만, 실제 현실에선 낮에 밤이 깃들어 있고 밤에 낮이 깃들어서 서로 오고가기에 그 낮과 밤을 딱 쪼개어 말하기 어렵듯이, 우리 삶에서 선과 악도 꼭 그러하다. 낮과 밤 그리고 선과 악은 편의상 설정한 ‘추상적인 깃발로서 기준개념’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차이내어 구별지을 수 없이 서로 뒤섞여 얽혀서 끝없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어져 있다.( 실은 낮과 밤 그리고 선과 악만이 그러한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이게 이른바 자끄 데리다가 말하는 ‘Differance:차연差延’이다. 분명코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굳이 그 차이를 갈라서 구별지울 수 없는 차이들의 끝없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뒤섞임 얽힘 맞물림. ) 이 드라마가 그 어떤 드라마 영화 소설보다도 현실적 리얼러티가 생생하게 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펼쳐지는 사건과 인물들이 선과 악이 미묘하게 이중 삼중으로 겹치며 뒤섞여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종합병원에서 의대교수 의사 간호사 환자들 사이에 오고가는 다양한 사연을 배경으로 하면서 인간사의 진흙탕 싸움을 그리고 있지만, 실은 인간이 여럿이 모여 사는 조직사회에는 그 어느 곳에나 많든 적든 이런 모습을 갖고 있다. 온 세상이 경쟁으로 뼈를 깍아내는 지금 우리 사회 같은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일의 겉모습이 다르고 그 농도가 다를지언정, 이런 모습은 바로 내 곁에 있고 바로 내 주변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라 내 자신이 이 진흙탕에 얽혀든 듯이 실감나게 빠져들었다.


이 드라마를 펼쳐가는 연출력도 돋보이지만, 그 사건들에 얽혀드는 인물들의 연기력도 참으로 빼어나다. 곰삭은 깊은 맛이다. 특히 선임 외과과장(이정길)과 부원장(김창완)이 보여주는 현실적 리얼러티가 단연 돋보인다. 이들이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 선과 악을 가늠하려는 게 오히려 유치해 보일 정도로 그 이중적 측면이 미묘하게 뒤섞이고 얽혀들며 어우러지는 절묘한 줄타기이다. 내 삶에서 이미 만났고 또 곧 만날 법한 생생함으로 바짝 다가온다. 이 둘 사이에 흐르는 크고 작은 줄다리기의 손맛이 내 손끝에 파르르르 떨려온다. 까페 여인(김보경)은 그저 중심인물의 주변을 맴돌며 감칠맛을 내는 조연으로 흘려 넘길 수 없다. 눈웃음치며 얄밉도록 약삭빠르게 눈앞의 이익만을 쪼옥 빨아내는 그런 술집여인이 아니다. 도도한 자존심으로 다진 품격을 맵시 있는 섹시함에 녹여 담고서, 꼬리 아홉의 마력을 날카로운 발톱에 깊이 감쳐둔 백여우다.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든 그 영악한 매혹이, ‘야릇하게 몽환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려 눈먼 숫사마귀처럼 온 몸을 내던져 잡아먹히고 싶은 자살충동을 일으킨다. 말을 더 잇지 않는 게 좋겠다. 치명적인 여자다. 열등감마저 덮쳐온다.

주인공 외과의사 김명민이 싸늘하게 뿜어내는 눈빛에 다부진 야망이 거침없이 건방지고 오금 저리도록 도저하다. 때론 부럽기까지 하다. 그 캐릭터 자체는 현실적인 리얼함이라기보다는 시청자들의 카타르시스를 노리며 인기를 끌기 위해 일부러 ‘조작된 리얼러티’이다. 그 반대쪽에 선 ‘천사표 내과의사’는 김명민의 치열한 야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더욱 조작된 이미지’이다. 일본판에서는 ‘권선징악’으로 끝난단다. 애당초 출발에서부터 ‘권선징악’으로 끝날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아마 야망의 외과의사는 망하고 천사표 내과의사는 흥하는 모양이다. 현실 세상에선 그 거꾸로가 거의 대부분이기에, 이게 이 드라마의 생생한 리얼러티를 많이 갉아먹는다. 스토리 중심줄기에 이런 맹점이 있으니, 이 드라마 전체의 리얼러티에 큰 문제점이 있다며 폄하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펼쳐지는 사건과 거기에 얽혀든 인물들의 행태를, 5년 10년으로 쭈욱 늘여서 천천히 진행시키며 그 일일마다 굽이굽이 사이사이 틈새 틈새에 끼어든 구구절절한 사연을 낱낱이 그려 넣는다면, 그것은 훨씬 더 생생한 ‘현실적인 리얼러티’를 담게 될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지금까지 만난 드라마 영화 소설들이 모두 어떤 사건과 인물의 선악과 시비를 극단적으로 몰아서 일부러 드라마틱하게 엮어내어 그 강렬한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부추긴다는 걸 생각하노라면, 그 어떤 드라마 영화 소설보다도 ‘현실적인 리얼러티’를 보여주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일본판에선 ‘권선징악’으로 끝난다지만, 한국판이 여러모로 돋보이기에 그 깊은 감칠맛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 두고 보아야겠다. 한국판의 마무리를 보고나서, 현실 세상에서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생생한 리얼러티 그리고 이 드라마에 깔린 선악의 대립과 권선징악이 어떤 레벨에서 접점을 잡아내는지를 다시 이야기하고 싶다. 현실과 드라마에서 Fact와 Fiction이 서로 뒤섞이며 엮어내는 스펙트럼과 그 차이점.

* 영화 드라마 소설을 보거나 놀이를 할 때에는, 차가운 머리로 냉철하게 분석하는 게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열정적인 몰입을 하여야 합니다. 냉철한 분석은 그 놀이가 끝난 뒤 적어도 1시간 대체로 하루 이틀이 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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