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16년 9월 12일 월요일
손님 사랑합니다.



갈치낚시, 가을에 접하는 별미


 졸음운전, 음주운전보다 더 위험..
 여름철 물놀이 안전수칙
 여름철 건강관리 요령
 완강기 사용법
 비상구 등 피난.방화시설 관리방..
 기획공연 연극『난영』 공연
 일본역사테마기행
 삼학도 문화제전 사진모음
 해남군립예술단 성인합창단 신규..
 2007 삼학도문화제전 행사진행표
 법과 규제가 사람을 죽이[evil]..
 도둑은 수천이라도 잡아야 하며 ..
 함평군립 미술관 건립 추진을 충..
 "왜"함평군은 군민의 눈,귀,입를..
 [동참] 부패한 종교, 시민의 힘..
 뉴스 없는 뉴스를 전하는 최일구..
 현재의 공중파가 조중동 방송이..
 mbc가 있어서 방송이 산다.
 용산이 사라졌다
 문화방송은 변하지 않았다
박수한의 해남이야기


해남 '미황사'
박수한 2004/07/24 09:46    

해남 미황사

습관처럼 땅끝으로 간다. 먼 해남의 땅끝으로 가야지 왠지 본격적인 바다가 시작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사실 나로서는 ‘땅의 끝’이라는 ‘육지 중심적 사고’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땅끝이 아니라 바다로 진출한 곶(串)이기 때문이다. 육지의 끝은 바다의 시작이기도 하기 때문에 시작과 끝을 따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땅끝의 남도 바닷길을 가다가 ‘엉뚱하게’ 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바다 대신에 역설적으로 산에서부터 출발하려는 것이니,해중산인(海中山人)의 속깊음을 미황사에서 확인해보려 함이다. 바다와 육지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뜻깊은 변증의 세계가 미황사에서 펼쳐지고 있다. 땅끝이 국토의 남쪽 끝이라면 미황사는 육지 절집의 최남단이다. 미황사는 남도에서 바다로 가는 매혹의 길목 풍경을 가장 잘 껴안고 있다. 동백나무숲,장중한 부도밭,기암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달마산(達摩山),그리하여 ‘호남의 금강산’으로까지 불린다. 그 무엇보다 미황사 대웅보전 기둥 주춧돌을 잊지 못하리라.주춧돌의 게딱지와 거북이를 생각하는 탓이다. 왜 바다에 사는 게와 거북이를 양각으로 새겨놓았을까.

문제는 달마산에 오르면 풀린다. 남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예의 땅끝은 물론이거니와 완도와 진도,그네들 섬에 딸린 조도군도를 위시한 자잘한 다도해의 ‘호수’들,심지어 날씨에 따라서는 한라산 봉우리까지 잡힌다. 그 산자락에 미황사가 안겨있으니,산이 바다를 안고 바다가 산을 품은 격이다.

달마산에서 맞이하는 다도해 낙조는 또한 무엇에 비할 것인가.어느 석수쟁이가 있어 불현듯 게와 거북이를 새겨놓았으리라.왜 그랬을까.숙종 18년(1692)에 민암(閔,1634∼1692)이 지은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蹟碑)를 보자.‘신라 경덕왕 8년 8월12일,홀연 돌로 만든 배 한 척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에 와 닿았다. 하늘에서 들리는 음악인 듯 범패소리가 배 안에서 계속 들려오기에 어부들이 가까이 가 살펴보려고 하자 배는 문득 멀어져버렸다. 소식을 들은 의조화상(義照和尙)이 향도 100명과 함께 해안가에 가 기도를 올리자 돌배가 뭍에 닿았는데,금옷 입은 사람이 노를 잡고 서있었으며,경전과 불상이 가득하였다. 또한 배 안에 있던 검은돌이 벌어지며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옷 입은 자가 말하기를,나는 본디 우전국(優 國:인도)의 왕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상(經像)을 모실 곳을 구하다 달마산 꼭대기에 일만 분의 부처님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곳으로 찾아왔노라.경전을 소에 싣고 가다보면 소가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곳이 있을 터이니,그곳이 곧 경전을 안치할 만한 장소라.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산골짜기에 이르러 소가 크게 울며 죽었다. 소가 누워 죽은 그 골짜기에 미황사를 짓고 상을 봉안하였다. ’ 미황사의 ‘미’는 소의 울음소리에서 취한 글자요,‘황’은 사람의 색에서 취한 것이라 하였으니,사적비의 연기설화와 절집 이름이 일치한다. 그런데 비문에 이르기를,당시 돌에서 나온 소며 금옷입은 사람 이야기 따위는 허황하고 망연하여 세상의 귀로는 믿기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연대의 고증을 그저 추측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패엽경과 탱화 등이 있어 완연하게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대웅전은 부처님 모시고 온 배 사적비가 세워진 조선후기까지 남아있던 이들 증거물은 불행히도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웅전의 우물천장에 범어(梵語)로 쓰여져 있으며,인도에서 경상을 실어 보낸 배가 이곳에 도착하였다는 데서 국제적 해상교류의 느낌이 전해진다. 완도 청해진이 지척이니 이 일대 해상세력들의 서원(誓願)으로 미황사가 창건됐음직하다. 사찰 창건에 필요한 주요 물자들도 해상에서 들여왔고,미황사 창건에 당대 해상세력들의 직·간접적 지원과 참여도 있었을 것이다.

주지 금강스님은 미황사 연기설화(緣起說話)를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해석하였거니와 건축학자 양상현(순천향대)도 같은 입장이다. 대웅전 주춧돌에 게와 거북이 노닐고 있으니 주춧돌과 그 아래의 기단은 바다를 상징한다. 대웅보전은 바다 위에 떠있는 배가 되는 것이다.

바닷길로 부처님을 모시고 온 배를 상징함이다. 바다 절집의 압권은 부도밭이다. 서편의 아름다운 동백숲 길을 따라 10분 정도를 들어가면 달마산을 배경으로 부도와 탑비가 모셔져 있다. 남쪽과 서쪽 부도밭 2개다. 곳곳에 장엄된 부도 조각에는 서남해의 해산물과 우리 국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식물들을 문양의장으로 채용하고 있다.

게와 물고기,거북이,심지어 다리를 꼰 오리,방아찧는 토끼에 이르기까지 자유분방한 장엄으로 가득차 있다. 엄정하고 단아할 뿐더러 소박하기까지 하여 일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조선후기 부도양식에서 이처럼 ‘장난치듯’ 민화풍 풍속의 세계관을 펼치고 있음은 미술사적 전환을 암시한다. 문화사적으로도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작은 혁명’을 성취하고 있는 중이다. 유독 해산물이 자주 등장함은 연기설화와 더불어 미황사가 바다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암시한다.

부도밭의 주인공들은 서산(西山)대사의 제자들.서산은 임란 후 자신의 의발(衣鉢)을 저 멀리 남쪽 해남 대둔사(대흥사)에 전수한다. 그로부터 서산의 법맥은 강진의 만덕사,해남의 대둔사와 미황사로 그 영향력이 확대되어 간다. 이렇게 해서 미황사는 서산의 후예들이 남도불교를 일으킨 진흥지가 되었고,이 부도들이 당대의 역사를 웅변해 준다.

조선 후기에만 3번에 걸친 중창불사가 이뤄졌으나 300여년이 지난 지금은 다만 부도군만이 오롯이 자취로 남아있다.

재미있는 것은 부도밭의 주인공들이 대개 인근 해변이나 섬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7대 종사 연담(蓮潭)은 수륙도장(水陸道場)을 개설하였는 바,바다에 인접한 미황사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둔사 8대종사 운봉(雲峰)은 가끔씩 섬으로 숨어들어가 자신의 초가집 암자에 야은(野隱)이라는 편액을 걸고 살기도 하였다. 금하(錦河)는 장산도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을라치면 살 수 있는 것을 골라 물 속에 넣어 살려주었다고 한다. 즉원(卽圓)은 정조 18년(1794)에 궁복도(弓福島)에 있는 암자에서 열반에 들었다.

부도에 유난히 해산물이 많음은 부도의 주인공들이 바다에서 태어나서 바다로 되돌아 갔음을 암시한다. 천진난만한 물고기와 거북이,게 그림에서 흡사 이중섭이 제주도 피란시절에 그렸던 그림이 떠오른다. 지고의 경지에 이르면 이렇듯 천진한 어린이들 세계로 빠져드는 것일까.장난치듯 새겨놓은 해산물에서 바다 냄새가 달마산 자락까지 배어있음을 감지한다.

●장난치듯 새겨놓은 부도조각 바다는 늘 인자한 것만은 아니다. 120여년 전 해남 출신 주지 혼허(渾虛)와 40여명의 스님들이 바다에서 몰살당한 전설도 전해진다. 중창불사를 위한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로 향하다 조난당해 젊은 스님들이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그후 절은 폐사되다시피 몰락의 길을 걷는다. 지금도 사하촌(寺下村) 사람들은 비바람이 을씨년스러운 날이면 ‘미황사 스님들 군고치듯한다. ’고 한다. 인근 송지면 산정리의 농기에는 삿갓 쓴 스님들이 거북을 타고 있는 그림이 전해진다.

땅끝으로 가는 길을 잠시 접고 미황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소이는 이와 같음이다. 바다가 산을 벗하고,산이 바다를 벗하여 산중에 반야용선을 들여놓았고,게와 거북이와 물고기를 풀어놓았음이랴.지금은 남도의 끝자락으로 불리지만,청해진을 필두로 동북아를 주름잡던 해상세력의 근거지가 이 일대였으니 ‘땅의 끝은 바다의 시작’이란 말이 실감난다. 달마산에서 ‘왜 달마란 이름이 남쪽으로 왔는가.’를 통속적으로 묻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니,‘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듯 이미 남송(南宋) 사람들에게도 달마산은 영험한 도량으로 알려져 있었음직하다. 1281년 겨울에 남송의 배가 표류하여 근역에 당도하였을 때,달마산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름만 듣고도 멀리 공경할 뿐인데,그대들은 이곳에서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다. ’고 하였다.

신라시대는 물론이고 고려시대까지도 국제 해상교류의 중심처였음을 설명함과 아울러 달마산의 국제적 위상까지 설명해 줌에랴.

‘택리지’에 이르길,해남 근역들은 모두 살기에 부적당하고 하였다. 그러나 육지 중심이 아니라 바다 중심의 세계관적 전환을 고려한다면,그 언설을 전면적으로 승인하기는 곤란하리라.더군다나 바다가 절집에서 숨쉬는 풍경을 보노라면 바다와 육지를 가르는 불이(不二)를 도저히 용인할 수 없으리라.

독자 의견 목록



의견글 쓰기
글은 인터넷에서 자신의 인격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글쓴이 비밀번호
제 목
내 용



  간큰 농협[3] 2005.12.01
  역사가 후진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영원한 노빠[1] 2005.11.04
  농민대회와 트렉터 반납[3] 2004.12.08
  생각이 바뀌여야 행동이 바뀐다[2] 2004.12.03
  관습 헌법의 충격[11] 2004.10.23
  추석에 작은어머님이 주신 선물[3] 2004.10.09
  → 해남 '미황사' 2004.07.24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라. 2004.07.21
  노빠들의 외침[4] 2003.12.19
  우리사회의 이중성[3] 2003.12.06
  이정일 의원님과 민화식 군수님께 드리는글[2] 2003.11.20
  전라도는 어디로 가는가[6] 2003.07.23
  벌써부터 시골은 '묻지마 관광'[5] 2003.07.11
  저 논의 잡초들을 어떻게 합니까?[2] 2003.06.24
  5.18과 요즘정치[2] 2003.05.18
  우리의 자화상과 월동배추[5] 2003.04.30
  형평성 안맞는 농자금 대출[3] 2003.04.19
우리힘소개 | 개인정보보호정책 | 광고문의 | 기사제보 | 제휴문의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 거부
Copyright © 2003 인터넷신문우리힘닷컴주식회사 All rights reserved Tel : (061) 277-5210 / Fax : (061) 277-5290
신문 등록번호 : 전남 아 1 등록일 : 2005.08.11 발행인 : 김은정 / 편집인 : 오승우 54.161.77.30